로버트 맥체인 목사는 29세에 세상을 떠났고 몇 년 밖에 목회를 못했던 분이지만, 그를 알고 읽고 만나는 사람마다 부끄럽다고 느끼게 하는 분입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전기들이 최근에도 줄곧 출판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과 나누었던 말씀 가운데 여기에 소개하는 요한 계시록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 강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그의 본 설교는 수년 전 번역하여 교우들과 구역공부 교재로 사용했던 것이며 합신 교단 개혁신보에도 게재했던 것입니다.

The Seven Churches of Asia   by Rev. Robert Murray McCheyne

첫 번째 설교: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요한계시록2:1‐7).”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일곱 편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편지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전에 어떠했는지 뿐만 아니라 그가 영광중에 계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보여주기 때문에 감미롭습니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의 육체의 날에, 그가 땅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을 때에 어떠하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감미롭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예수님께서 성부의 오른 편에 서 계시는 지금 그가 갈릴리 바닷가에 계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일하시며, 또한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그가 지금 자신의 제자들 곁에 서서 그들을 축복하시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을 때와 동일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감미롭습니다.

본 편지는 아시아의 교회들 중의 으뜸인 에베소의 교회에게 보낸 것으로 바울이 그 교회에 두 번 갔었고, 거기서 삼년 동안 머물렀으며, 디모데를 남겨두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언급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들 사이에 다니신다고 말합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을 붙잡고 계시는데 이 별들은 그의 목사들입니다. 오른 손은 힘의 자리이고 목사들은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합니다. 사람들이 지금 목사들을 너무 많이 바라보며 그들로부터 지혜 얻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여러분과 그리스도 사이에 놓여 있도록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듯이 장대의 유일한 용도는 놋 뱀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장대를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그같이 우리도 여러분 모두가 보는 데서 그리스도를 들어올리기 위하여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앞에, 또한 우리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를 들어 올려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들은 사라지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별은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여 그 어린 아기가 누우신 곳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그같이 우리도 별이 되어 여러분들을 그 어린 아기가 누우신 곳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샛별은 해가 뜰 때 사라지고 많은 별들은 영혼이 그 해에게 인도되었을 때 사라집니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들 사이에 다니십니다. 그는 교회들 사이에 다니십니다. 그는 오늘 저녁 이 교회 안에 계십니다. “너희들은 온 세상으로 가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 우리더러 이 사악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떠나 저 현혹시키며, 저 잔혹한 세상으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아마 지금 그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땅 위에 계셨을 때 금 촛대들 사이에 다니셨고 여전히 그들 사이에 다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신자들 사이에 다니고 계시니 그들은 촛대들입니다. 그들은 한때 쓸모없는 쇳덩이였으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금, 정금이 되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했던 것은 금 촛대들 사이에 다니며 그것들이 계속 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으니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는 신자들 사이에 걸어 다니시면서 그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이 타고 있는지 살피시고, 새로운 기름을 부으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공기가 전혀 없는 곳에 등불을 놓아두면 그것은 꺼져버립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필요로 하며 하늘과 땅 안에 있는 모든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입니다. 그것들이 곧 희미해 질 수 있지만 그가 그것들이 계속 타도록 지키실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들을 아노니.” 예수님께서 그들을 알고 계십니다. 자, 이것이 여러분을 떨게 합니까? 그것이 여러분으로 두렵게 합니까? 그리스도의 눈이 여러분을 보고 있다는 것이, 그가 “내가 네 행위들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 여러분으로 머리서부터 발바닥까지 떨게 합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가 네 죄를 안다.”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그에게 “저는 주님의 고난을 압니다.”라고 말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나는 많은 것을 가진 너의 모든 부족들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은 그에게 “저는 주님의 충만하심을 압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라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저는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가지셨고 주님은 전능하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에게 “나는 너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그에게 “저는 주님의 지혜를 알고 있고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주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 드리십시오. 그가 여러분에게 “나는 어둠이 네 안에 있는 것을 안다.”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빛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왜냐하면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무엇을 말합니까?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리고 그는 기뻐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강포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선행 또한 아십니다. 그는 그를 위해 드려진 모든 물잔을 아십니다. 그를 위한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고동과 그의 백성, 그의 형제들에 대한 애정의 모든 행위들을 알고 계십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며 그가 그렇게 느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각 신자는 이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 속에, 동기의 불순함 같은 많은 악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여러분이 나그네에게 친절했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한 개의 알갱이라면 다른 감정, 아마도 칭찬에 대한 사랑이나 좋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백 개의 알갱이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백 개의 알갱이들을 뿌리시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의 한 알갱이를 거두시고는 여러분에게 말하십니다. “내가 너의 행위들과, 너의 수고와, 너의 인내를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한 칭찬에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것은 “네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분명한 표지이니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지금 만일 제가 이리저리 기독교인을 살펴본다면 그들이 이것에 대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제가 발견하겠지만 저는 그러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것, 상당히 많은 것을 보고 싶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 사귐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같은 거리를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소돔에 살아야만 한다면 저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날마다 의로운 영혼을 상했던 롯처럼 되십시오. 그러나 오히려 여러분은 아브라함같이 되어서 헤브론 땅에 거하십시오. 여러분은 전혀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특별한 소유”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출생을 가지고 있으니 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교육을 받으니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여행을 하고 있으니 시온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과는 다른 휴식처들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의 우물들 가에서 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임종을 가지고 있으니 여러분은 말합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다른 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세 번째 일을 보겠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자기들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날이 여러분 중의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거짓 사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을 속이고 오도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율법과 증거”에 의하여 그들을 시험하십시오.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들의 말에 근거하여 그들이 말한 것을 믿도록 요구받는다면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말씀에 의하여 그들을 시험하십시오.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사적이어서 이 말씀이 그러한가 아닌가 알아보려고 상고하였으니 여러분도 저들의 신사적인 것으로 신사적이 되십시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한 칭찬에서 말씀하신 네 번째 일을 보겠습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내가 아노라.” 고난당하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훨씬 쉽고 병상에 누워있는 것보다 휫필드가 되어 땅끝에서 땅끝까지 설교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재난으로 인하여 우리로 낙심하게 하고 한숨지으며 울부짖게 하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부분 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가슴 밖으로 내지 못한 근심, 이름 없는 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이들은 피붙이에서 피붙이의 마음에게만 말하는 근심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러한 일들 어느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병상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며 싫증내지 말고 참아야 합니다. 단념은 아주 감미로운 은혜이니 그것은 이곳에서만 길러질 수 있습니다. 신자는 두 종류의 은혜들을 가지고 있으니 순결과 단념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순전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념을 가지실 수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주권을 가지셔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단념하는 것은 대단히 감미로운 은혜입니다. 그것은 땅 위에서 자라는 꽃입니다. 저 쪽에서는 피지 않습니다. 평생을 설교하러 다니며 밤낮으로 설교하는 것이 병들어 참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땅에서 많이 고난을 받았으나 지금 영광중에서 아주 밝게 빛나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참는 순종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을 보겠습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약간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약간”이란 단어는 원문에 없습니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에 의하여 그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네가 너의 첫 사랑을 버렸으니 내가 너를 싫어한다.”이거나 “내가 너를 이것 때문에 싫어한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깨우침을 받았을 때 여러분의 부패함을 보고서 괴로움 가운데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드러내신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여러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처음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의 죄들이 여러분을 고소할 때 여러분이 ‘나의 구속자를 보라, 누가 정죄하리요?’ 하였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는 친구가 중한 병이 들었는데, 그의 가슴이 숨을 쉬고, 그의 눈이 뜨이며, 눈이 더욱 맑아지고, 가슴이 안정되게 호흡하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첫 신호들을 보고 얼마나 큰 기쁨이 여러분의 가슴을 채웠는지 기억하십니까? 또한 밤의 어둠 속에 누워 말하기를 아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고 있을 때, 첫 햇살이 여러분에게 비추이면 여러분이 무엇을 느끼셨는지, 그것이 여러분의 가슴을 어떠한 기쁨으로 채웠는지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처음 그리스도를 소개 받았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처음 들어갔을 때, 여러분이 ‘그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주 그에 관하여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처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떠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들어왔던 벅찬 기쁨을 기억하십니까? 이것이 “처음 사랑”이었으며 이것이 혼인의 사랑이었으니 여러분이 버린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다가오는 성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기대했었던 성찬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제가 모르긴 해도 믿는 바는 (제가 저의 교구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이보다 여러분 모두에게 제가 전할 수 있는 말씀, 여러분 거의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고 봅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이것이 오늘 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책망하시는 이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이 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고난당하신 그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이시며 여러분을 위하여 자기의 본향을 떠났던 그분이십니다. 여러분을 책망하시는 이가 예수님입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네가 단지 하룻밤만 나를 사랑할 수 있고, 한 시간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도 없고, 나를 사랑하는 일에 그렇게 빨리 싫증을 내다니, 내가 그렇게 변변찮은 사랑의 대상이었단 말이냐?”

그리고 저는 이 말씀을 여기 있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비록 처음 사랑을 가진 적이 없었을지라도 여러분 중에 많은 이들이 지금보다 전에 더욱 많이 근심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깨우침을 받았을 때보다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다시 깨우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많은 이들이 소돔에서 빠져 나왔지만 아직 소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자,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의 심판이 어떠할 것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한때 모퉁잇돌 위에 세워졌었습니다. – 아, 어떻게 떨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은 한때 새빨갛게 단 숯이었습니다. – 아, 어떻게 그렇게 식어버렸습니까! 오, 여러분은 한때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더 많은 열심을 가졌었습니다. – 아, 어떻게 떨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이 앉아 이것을 생각하는 반면 여러분은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무슨 말이오! 내가 다시 회심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회심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급히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런 일에 시간을 늦추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빨리 회개하기를 간청하오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오! 그리스도의 심판들이 얼마나 두려운지요! 그분이 여러분의 목사를 데려가실 수도 있고 또한 말씀의 빛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요나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여러분이 아십니다. 타락한 한 영혼 때문에 온 바다가 흔들렸습니다. 그같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한 사람 때문에 여러분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제게 고난을 주십시오. 질병을 제게 주십시오. 가난을 제게 주십시오. 어느 것이라도 제게 주십시오. 죽음 자체라도 제게 주십시오. 그러나 주의 빛은 제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제가 흑암에 처하고 생명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보겠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싸우고 있으며, 우리는 전장에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이들은 싸우고 있고 힘들게 싸우고 있으며 여러분이 이기고 있음을 저는 압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낙원 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먹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그것을 보게 된다면 만일 우리의 촛대가 그때까지 옮겨지지 않는다면 여러분 중에 많은 이들이게 이것이 복된 성찬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될 성찬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설교: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요한계시록2:8‐11).”

 

지난번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셨으며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가 속히 오셔서 그 자리에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번영하는 교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히 오셨고 그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지금은 단지 폐허의 무더기일 뿐입니다. 여행자가 거기 있으면 그는 고대의 건물 흔적들, 돌무더기들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가 한때 서 있었던 곳에 노란 콩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 교회가 있었던 곳 근처에 한 마을이 있는데 여행자인 하틀리씨가 그 마을 전체에 단 한 사람의 신자를 발견했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니 우리의 촛대를 옮기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교회들을 가지고 있고 번영하는 교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촛대가 옮겨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할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우리를 폐허의 더미로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는 아주 다릅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 일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서머나의 기독교인들이 아주 거룩해서 심지어 그리스도의 눈이 어떤 허물도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자, 우리는 그 말씀으로부터 어떤 위안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신다면 그것은 책망으로 가득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서머나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지금 어떠한 것과 같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신의 피로 씻어주셨고 자신의 의로 저들의 벌거벗은 영혼들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아주 아름답게 보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은 저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친절과 사랑이 가득합니다. 서머나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렇습니다. 긍휼, 평강, 온유, 친절, 사랑이 가득합니다. 서머나는 아직도 아시아의 아주 번성하는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십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여러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목사들이 있는 두 지역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곳 어디서든지 등불을 켜십니다.

그러나 이제 서머나에 보내신 말씀을 보고 첫째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어떠한 모습을 취하고 계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모든 말씀들에서 다른 모습들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각 경우에 적합한 모습을 취하신다는 것을 주목하노라면 참 놀랍습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그는 “오른 손에 일곱 별들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들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고 하시며 자신이 원하실 때 촛대를 옮기실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여기서는 그는 자신의 격려하시는 모습을 취하십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첫 장에서 예수님께서 밧모 섬에서 요한에게 계시되었을 때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았음을 주목하십시오. 요한은 자신이 그를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땅 위에 계실 때에 말씀하시던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기 요한이 기절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 말라.”는 동일한 말씀을 하심으로 그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 위에 계셨을 때 그가 자기의 오른손을 내미셨던 것처럼 자기에게 하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처음이요 나중인 이가 가라사대.” 그는 창조에 있어서 처음이셨고 그 일에 나중이 되실 것입니다. 두루마리처럼 모든 것을 모으실 이도 그분이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이도 그분이십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그리고 그분은 섭리에 있어서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죽는 날까지 일어나는 모든 섭리들을 정하십니다.

그는 은혜에 있어서 처음이시니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신 이가 그분이시며 그분은 그 일에 나중이셨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이가 그분이십니다. 이 교회의 주춧돌을 놓으신 이도 그분이시며 꼭대기 돌을 놓으실 이도 그분이십니다. 그는 영혼 속에서 은혜의 일에 있어서 처음이시며 또한 그 일에 있어서 나중이시니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도 그분은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하노라.”

그리고 다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에 관하여 자신이 죽었었고 다시 살아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 모습이 얼마나 격려가 됩니까!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만 여전히 죽어있으실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이것이 깨우침을 입은 영혼에게 평안을 줍니다. 자,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여, 여러분은 아주 안전하니 어떠한 진노도 여러분에게 임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분량이 그분의 머리 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1,800년 전에 일어났던 천둥과 번개와 지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진노가 여러분에게 임할까 걱정할 이유는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평안을 줍니다.

하지만 평안을 주는 또 하나의 일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가 일어나셨고 받아들여지셨으며 지금 하나님의 오른 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평안을 가지는 것이니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보시기에 기뻐하시며 또한 받으실 만하게 될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세 종류의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고통들은 자주 함께 돌아다닙니다. 한 가지 시련이 드물게 홀로 옵니다. 아마 질병이나 혹은 사별 그리고 나서 궁핍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쓴 물에 나무를 던져 그것을 달게 한 것처럼, 잔 속의 단 것이 많아서 쓴 것의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쓴 잔을 달게 한다고 생각되는바 예수님께서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는 여러분의 모든 고난들을 달아보시며 너무 많게도 너무 적게도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기독교인의 시련들 중 또 다른 하나이며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언급하신 세 번째 것은 마귀 사탄인데 이것은 그들 모두 중에서 가장 악한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시련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그 모든 교회들 중에 가장 순결한 교회였습니다. 금이 불에 던져지면 모든 찌끼들이 없어지는 것 같이 서머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 교인들 중에 여럿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아주 보배로운 사람인 그들의 감독 폴리캅이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탄이 지금 분주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그는 어떤 때에는 우는 사자이며 어떤 때에는 빛의 천사입니다. 지금 우리가 핍박을 받고 있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지금은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섞여 있고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거의 세상과 구분되지 않습니다만 세상은 예전처럼 여전히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여도 놀라지 말라.” 그러나 마귀가 다시 우는 사자처럼 나와 자기의 삼킬 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옥들이 다시 기독교인들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격려들을 봅시다. 그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저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온 세상이 저에게 “너는 부자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가난하다고 그들에 관하여 곧잘 말합니다만 그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이 말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가 거의 믿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말씀은 상당히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의 교회 교우들 중에 믿음에 있어서 부요하게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적습니다. 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비참하게 가난한 것이고 더욱 비참하게 가난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부해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의 상속자들이 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고난들 중의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오, 그것은 참으로 감미로운 말씀입니다. 그것들 중에 어느 것도, 그 중에 가장 큰 것이나 가장 작은 것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닷가에 서 있으면 때때로 아주 작은 파도가 온 다음 아주 큰 파도가 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고난이 때로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적은 시련을 보내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여러분이 큰 것을 맞이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중의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그 짐들을 져야 한다면 여러분은 쓰러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주님께로 가져가서 그에게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오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아무 것도 질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여기 기독교인들 중에서 이러한 모양, 저러한 모양으로 고난을 받게 되지 않을 한 사람이라도 있으리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고난을 받게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환난과 가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고난을 받아야 할 이러한 일들의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또 다른 격려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 두 번의 죽음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임종의 자리에 있어본 일이 있습니까? 눈이 풀어지고 입술이 떨리며 손이 차지며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죄를 자각한 사람, “오, 다른 날이라면! 오, 다른 시간이라면! 오, 다른 순간이라면!”이라고 부르짖는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임종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둘째 사망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을 때, 해가 여러분의 모습을 보게 할 때, 그것은 단지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는 정말 실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죽음을 그리스도 없는 영혼들의 둘째 죽음의 모형, 혹은 그림자로 의도하신 것이라고 충실한 목사들이 동의하며 저는 그것이 참되다고 믿습니다. 만일 첫째인 그림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이라면 둘째 죽음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 되지만 결코 죽지 않고, 당신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볼 때 그가 물을 먹으려고 애를 쓰지만 삼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저들의 말라붙은 혀를 식히려고 물 한방을 구할 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없이 죽는 사람의 타오른 갈증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침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생명에 이르는 입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가 그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날 것이며 그를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것은 한 곳에서는 금 면류관이라고 하며 다른 곳에서는 의의 면류관이라고 하며 다른 곳에서는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결코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충성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죽는 시간까지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리스도께서 면류관을 입혀줄 때까지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설교 : 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요한계시록2:12-17).”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에 대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고 그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지금 에베소에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눈이 그 교회에서 책망할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이르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에서 칭찬할 것과 동시에 책망할 것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대해 사단의 위(seat)가 있는 곳이든지 혹은 사탄의 보좌(throne)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지방들 중한 수도였습니다. 그곳은 대단히 번영하는 도시였으니 상당한 부유함이 거기에 있었고 왕이 거기에 살았고 상당한 학문의 자리였습니다. 20만권의 도서를 가진 도서관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양피지가 처음 만들어졌고 그때부터 그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곳은 부유함과 왕권과 학문의 자리였지만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같이 아주 빈번히 부유함 혹은 상당한 인간의 지혜가 있는 곳마다 그러하듯이 마귀가 자기의 궁정을 가지고 있는 곳이 거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에 대해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버가모에 대하여는 매우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에서 촛대를 옮기셨습니다만 버가모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만일 그 교회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와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같이 버가모는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1820년에 그곳에 있었던 최근의 여행자는 그곳에 15,000 명의 주민이 있는데 이들 중 10분의 일은 명목상 기독교인들이고 두 교회가 있다고 전합니다. 그같이 그 등불이 희미하게나마 아직도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교회에 적합한 모습을 취하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옛 성직자들은 이 좌우에 날선 검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검은 은혜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며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시45:2).” 라는 구절과 또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아가서5:16).” 라는 구절을 취합니다. 그 검은 두 날을 가졌으니 한 날은 죄에 대해 확신시켜 주고 다른 날은 평안을 줍니다. 하나는 여러분에게서 죄들을 숨기는 휘장을 찢고 다른 것은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를 숨기는 휘장을 찢어 그분을 여러분에 보입니다. 한 날은 영혼에 상처를 내고 다른 날은 그 의사를 보여주며 치료하는 약이 상처 입은 영혼 위에 흐르게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옛 성직자들이 설명한 방식을 좋아하시는 분은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러나 이제 이 검은 심판의 검으로 생각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서 16절까지 저와 함께 읽읍시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여기서 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나라들을 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1,1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말씀으로부터 제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두 성품을 가지고 계시니 그는 구주이시며 동시에 멸하시는 자이십니다. 그는 지금은 온전히 구주이십니다만 언젠가는 모든 나라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지금 그 검으로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평안에 이르러 그때에 그것 아래에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에 주신 책망을 보겠습니다.

첫째, 저들의 위험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이 말씀이 크게 위로가 되는 것은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르시는 장소에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건치 않은 가정 안에서 가시밭의 백합으로 사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안다.” 여러분은 경건치 않는 이웃들 사이에 사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나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마귀는 버가모에 자기의 보좌를 가졌었는데, 그가 여기 이 도시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여기에 자기의 궁정을 가지고 있고 많은 부하들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아래서 마음을 굳게 닫고 앉아 있는가요? 그의 권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모두 멀리 떨어져 있단 말입니까? 자주 지적된 바와 같이 많은 곳에서 앞서 간 기독교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직 씨를 보존하고 계십니다. 버가모가 그렇습니다. 거기에 약간의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아직도 거기에 약간의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기에 약간의 신자들을 남기신 이유일 것이니 한때 여기에 충성스러운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이 아직 희미하지만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칭찬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 예수님에 의하여 굳게 잡혔고 그리고 또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는 것은 대단한 신비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됩니다. 아무 것도 그 같은 담대함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며 은밀하게 그리스도께 가까이 하는 것처럼 담대함을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바짝 붙어 그를 굳게 잡으십시오. 아니 오히려 그분이 당신을 붙잡으실 것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이 안디바는 누구입니까? 누가 그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누구입니까?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다른 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아주 잊어버렸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자신의 마음에 적어놓으셨습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아마 여러분 중에 몇 신자들은 아주 가난해서 자기 집에서 반 마일도 나가보지 못하고 여러분이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열두 명도 못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아십니다. 그가 여러분을 자신의 마음에 기록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서로 간에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는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깁니다. 기독교인들의 우리 작은 모임에서 어떤 이들은 떠나갔습니다. 우리들이 때때로 그들을 생각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밝은 얼굴들과 그들이 말씀을 듣느라고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들을 기억할 때 저들은 정말 귀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요! 우리는 얼마나 빨리 저들을 잊어버리는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그들을 기억하십니다. 그것이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들이 그분의 마음에 기록되었고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십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 속에 책망하실 것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을 때 그들을 감히 저주하지 못했지만 발락을 시켜서 그들 앞에 걸림돌을 놓게 하였습니다. 우리 중의 누가, 여러분 가운데 누가 예식들과 설교 말씀과 떡과 포도주를 중히 여기고 드러나게 기독교인들을 감히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놓는 그러한 사람은 없습니까?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으니 내가 이 일을 미워하노라.”

 

그리고 여러분 중에 여러분의 집안에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가진 이가 있습니까? 부모들이여, 여러분자신들은 기독교인일 수 있지만 만일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단지 말로만 한다면, 자기 자녀들에게 말을 했지만 막지 아니한 늙은 엘리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누가 니골라당의 교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친구로 가지지는 않았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죄였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너희는 나를 떠나라. 하나님께서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시는 심판은 무엇입니까? 그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들에게 어떠한 상이 있습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여러분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이것이 설명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하고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그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숨겨진 만나이니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습니다만 우리는 숨겨진 만나를 먹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먹고 살 것입니다. 그분이 “내가 너희에게 내 자신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경기에서 경주에 이기는 사람은 흰 돌을 받았습니다. 그것에 쓰인 이름이 있는데 그것을 가진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이기면 우리가 흰 돌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서도 그것을 가지게 될 것은 누가 신자가 느끼고 있는 평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죄의 사함의 평안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고 할 때, 우리가 진지할 때, 우리가 심술궂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속에 있는 평안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망하는 영혼들이여.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여러분도 이 평안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흰 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 주실 때, 우리가 가지게 될 평안을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 우리의 마음이 아주 깨끗해진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가 흰 옷, 곧 성도들의 의(義)인 깨끗하고 흰 세마포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가슴에 타오르는 기쁨을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평안을 가진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자의 왼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전장에 있으나 달릴 만한 경주가 아닙니까? 이깁시다. 그러면 우리는 숨겨진 만나를 먹을 것이고 흰 돌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그 돌 안에 기록된 새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네 번째 설교 : 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계시록2:18-29).”

 

두아디라는 성경에 오직 한 번 더 언급됩니다. 루디아와 그 간수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곳에서 아주 감미롭게 언급됩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성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설교할 때 이들은 아마 그 장소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었습니다만 이들이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은 바로 그 두 사람입니다. 루디아는 빌립보 성에서 나그네였습니다. 아마 그녀가 두아디라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저 이세벨이라는 여자에 의하여 미혹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녀를 여기에 데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방식으로 회심시키십니다. 그는 나그네들에게 시선을 두십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모든 영혼의 실들을 가지시며 영혼을 이끌어 의의 태양이 떠오르게 될 바로 그 지점으로 데려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중에 몇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가 여러분 중에서 나그네들이었던 몇 사람들을 취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때때로 한 영혼을 그 가족 한 가운데에서, 때때로 낯선 땅에서 회심시키십니다. 영혼이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곳은 그 영혼에게 항상 감미로운 곳입니다.

에베소는 자기의 처음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서머나는 가난했지만 부자였습니다. 버가모는 사탄의 보좌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아디라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 아는 모는 것은 책들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에 그곳에 대한 역사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 외에는 거기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곳의 역사를 아시니 그의 역사는 항상 가장 진실합니다. 현재 두아디라에는 오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집들은 거의 진흙으로 지어졌으며 그 도시는 터키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현재에 그들의 소유로 남아있습니다. 더 이상 두아디라가 아니고 터키식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거기 아직 몇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마지막 선교사인 파슨스는 말하기를 아직 경건의 모양은 있고 두 교회와 두 학교가 있으며 안식일에 모이는 그리스계와 아르메니아계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스스로 어떤 모습을 취하시는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여러분 중에 신자들인 이들이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아는 이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아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여러분은 그가 모든 권세와 모든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여러분의 신성한 구주에게 매달리십시오. 그러나 그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가 무한하며, 움직일 수 없으시며, 신성하시며, 영원하신 바위라는 이 말씀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두려운 능력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눈이 불꽃”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 속에 나무를 집어넣으면 곧 불꽃이 나무를 삼켜버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돌을 집어넣으면 그것은 그것까지도 삼켜버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쇠를 집어넣으면 그것도 삼켜버립니다. 아무 것도 불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이 그와 같으니 그 눈이 모든 것을 꿰뚫고 파고 들어갑니다. 제가 주님의 성찬 전에 여러분 중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시험하여 멀리 떨어져 있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말씀드렸고 이제 주님의 성찬 후 하나님께서 다른 이유로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하도록 저를 여러분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없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단지 겉모양만 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는 단지 마음을 보실 뿐 아니라 마음속을 들여다보십니다. 그는 살피시고 통찰하십니다. 그는 여러분의 모든 소원들과 계획들을 보십니다.” 본장 23절에서 그는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라고 말하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그리스도께 붙어있었지만 이미 세상과 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이 여러분을 보십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셨고 여러분을 따라가셨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기독교인인 이들이여, 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일부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도를 더 많이 보게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땅에 계셨을 때의 그의 눈을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그가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을 때, 그가 나인성의 과부 옆에 서 계셨을 때, 그가 나사로의 무덤에 계셨을 때의 그를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시더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동정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크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가 가지신 동정, 그분 안에 있는 무한한 동정을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중에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두 눈은 눈물을 시내처럼 흘립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눈이 또한 불꽃같다는 것을 기억시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습니다.

1장에서 말씀하기를 “그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고 하였습니다. 자, 발이 주석과 같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밟기 위해서지요. 이사야가 “좋은 소식을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말한 것 같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여러분은 좋아하십니다. 두 마리아가 그 발을 잡을 때 그들이 행한 것처럼, 죄인이었던 한 여인이 행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발은 또한 자기의 원수들을 짓밟는 빛난 주석과 같습니다.

미가서 4장 13절에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찌어다. 내가 네 뿔을 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내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재께 돌리리라(4: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짐승의 발에 놋 굽을 씌어서 곡식을 탈곡하려고 타작마당에 보냈던 것입니다.

이사야 63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등등.

그리고 요한 계시록 19장에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 눈은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말합니다.

자, 이 모든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리스도는 구주이실 뿐 아니라 또한 보수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지친 영혼도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큰 바위 그늘이시며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그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는 보수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는 밟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없는 자들을 짓밟으실 것입니다. 그들의 피가 그의 옷 전체에 묻을 것입니다. 보수자로서 주석으로 된 발을 가지고 오시는 것보다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께서 두아디라에게 주시는 특성이 어떠한지 보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람들은 제게 예레미야의 무화과들을 생각나게 하니 그들 중에 좋은 것은 극히 좋고 악한 것은 극히 악했습니다. 먼저 좋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행위]을 아노니” 전에 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랑(charity)”을 말씀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는 사랑(love)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한 여인에 대해 사함을 많이 받았으므로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많이 사랑합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며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모든 은혜들 중에서 사랑이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나무들의 싹들은 봄에 잎들이 나올 때 아름다운 초록색을 가집니다. 그같이 사랑은 줄기에 연결된 가지의 처음 싹입니다. 여러분은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기독교인들을 사랑하십니까?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아이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내가 너희 사랑과 “섬김”을 안다고 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여러분이 이 말씀의 의미를 아십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여러분 중에 일백년 동안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알아낼 수 없을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리라.”

그리고 다시 내가 너의 “섬김과 믿음”을 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섬김을 믿음 앞에 언급하시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섬김을 여러분이 많이 가질수록 많은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정당합니다. 나무가 크게 자랄수록 뿌리는 더 멀리 뻗습니다. 그것이 점점 더 깊이 땅을 붙잡습니다. 그같이 여러분이 사랑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행할수록, 더 많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같이 더 깊은 뿌리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너희 “인내”입니다. 선원이 바위에 매달려 있고 파도가 이리저리 치며 그를 떼어내려 할 때, 그는 더욱 인내하며 바위에 더욱 바짝 붙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같이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의 검은 파도들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들이 바위를 붙잡고 있을 때, 파도들이 와서 그들을 떼어내어 소용돌이 속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으로 무엇을 하게 합니까? 그것이 여러분으로 더욱 인내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여러분으로 여러분의 바위이신 분을 더욱 꽉 붙잡도록, 그리스도께 더 바짝 매달리게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우리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낫습니까? 우리는 지난 성례를 마친 후보다 이번 성례를 마친 후 더 많이 행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제가 알기로서는 여러분 중에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고 그리스도께서 속히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구주로 하여금 여러분에게 너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말씀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욱 복되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책망하셔야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자의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은 여성이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으로 가서 어린아이처럼 편견 없이 읽으면 여자는 가르치지 말고 집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이세벨은 악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자,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그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종들을 꾀하려고 하는 이세벨들은 없습니까? 여기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하겠고 저는 그것을 미혹되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최근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었습니까? 아닙니다! 천주교회에서 오라토리오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를 저는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몇 구절들을 취해져서 그것들로 음악을 만들고 그것들은 불경스러운 사람들에 의해서 불립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 신자들에게 생명이 되는 그 말씀들을 취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주님의 잔을 받고 그리고는 가서 귀신들의 잔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전에 앉아 있었는데 가서 우상의 전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아십시오. 여러분 또한 회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이 무엇입니까? 그가 무엇을 하려시고 합니까? “내가 사망으로 그 자녀를 죽이리니.” 사망으로!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그러나 이제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우리 싸웁시다. 기독교인들답게 아무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합시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일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내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를 보좌 위에 앉히리라.”고 말씀하시고 또 그가 “너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실 때 저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것이 다만 큰 영광이 되리라는 것 밖에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급입니다.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이 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광명한 새벽별이다.” 발람이 말합니다. “야곱에게서 별이 나오고 이스라엘에게서 홀이 나오리라.” 동쪽하늘에서 샛별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곧 날이 밝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같이 우리가 새벽별(샛별)이 어떤 영혼 위에 떠오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영혼에 대해 말합니다. “곧 새벽이 되겠군. 날이 곧 밝을 거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로 자신인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생명나무를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시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 자신입니다. 그가 감추었던 만나를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감추었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그는 “새벽 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의 구주이신데 우리가 다른 세상의 영역에서 영광 중 그와 함께 설 그때에, 밤이 없게 될 때에, 오직 낮만 있게 될 때에, 그때에도 우리의 구주가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벽 별을 주실 것입니다.

 

 

다섯 번째 설교: 사데 교회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계시록 3장 1-6절).”

 

우리는 이제 사데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이 교회가 우리에게 가장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회들 각각에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들의 이름 대신에 우리의 이름을 쓰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어울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보내신 말씀이 그들 가운데 다른 어느 것보다 우리에게 더 적합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모습을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일곱 영의 이름을 가시셨습니까? 여러분이 요한계시록 1장을 보시면 그것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신성(神性)의 완전으로부터 오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셨습니다. 일곱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히브리어로는 그것이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영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성령을 자신을 위해 가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그에게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형제들처럼 동료들처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게 될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시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깊은 물을 건너가야 할 때 “아빠, 저는 건너지 않을래요.” 말하는 아이처럼 그가 그것에서 뒤로 물러나시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격려하십니다. 어린아이의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얘야, 무서워하지 마라, 내가 네 손을 붙잡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손을 붙잡고 너를 보호하리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성부께서 그를 위해 일하셨으며 성령께서 그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천사들도 그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성령을 가지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에게 와서 그의 충만한 데서 취하게 되니 은혜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스도 안에 무한한 충만함이 있으니 우리는 그 샘에 와서 계속 마셔야 하며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그는 “일곱별”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말씀에서 같은 모습을 취하십니다. 우리는 별들이 그의 목사들인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오른 손에 별들을 가지신 것은 그들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할 목사들이 모자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에로 불러일으키셨다고 제 마음으로 믿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별들을 달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신다면 사람들 중에서 계획도 정책도 적어질 것이고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러하리라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을 더 많이 바라봅시다. 사람들을 적게 바라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오른 손에서 우리에게 별들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그들을 빛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목사를 가졌을 때 아마 여러분이 교회를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다. “난 저 사람에게 아주 실망했어, 오늘은 들은 것이 정말 없어.” 그리고 그것이 아마 정말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빛나도록 그의 손을 펴실 때에만 빛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은 지금 아주 어둡습니다. 만일 우리가 더 밝게 비추는 별들을 보려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그가 그들을 데려가실 것입니다. 어떤 곳에 별들을 두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시거나 아주 하늘에서 옮기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교회로부터 촛대를 옮기셨습니다. 여러분이 경건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별들을 옮겨가실 것이라고 제 마음으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별을 가졌을 때 그것을 잘 사용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 여러분이 당장 지금은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다음 달에는 가지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목사들을 따르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한, 그들을 따르십시오. 그들이 그 어린 아기가 누워있는 곳으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베들레헴의 별인 한, 그들을 따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사데에 책망하셔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봅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사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살았다는 이름조차 가지지 않은 수천 명이 있지만, 교회에 오고 기도회에 참여하는 여러분 중에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의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붙은 기독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형제들에게 살아있고 친절하고 애정어린 봉사를 하는 기독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오, 브레이너드의 인디언들과 어떻게 다릅니까! 여러분이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하고 주고받은 일이 있어야 합니다. 선행과 구제가 넘쳤던 도르가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자기 자녀들이 죽었을 때 잠잠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아는 이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고난 받으면서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감미로운 권고입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에 남아 있던 몇 사람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같이 여기에 여러분들 중에 죽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안식일에 혹은 기도모임에서 좀 찔리는 것처럼 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아침에 그 같은 마음으로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날이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꺾어진 꽃과 같고 병들어 죽게 된 아이와 같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을 굳게 하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여러분은 말씀을 기쁘게 받으나 뿌리를 가지지 아니하여 잠깐만 견디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후에 말씀을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즉시 그들은 넘어지지 때문입니다.

두 번째 훈계는 “깨어 있으라.”입니다. 마귀가 깨어 있습니다. 세상이 깨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으로 천국을 빼앗으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에 여러분이 등불을 들고 걷는다면 바람이 거기에 불어 들어와 끄지 못하도록 손으로 그것을 감싸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고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끄는 것이 아닌가 보십시오. 롯의 아내를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약간 길을 갔지만 뒤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한때 어떻게 느꼈었는지, 여러분이 한때 어떻게 말씀을 받고 들었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굳게 잡아 회개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형벌입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에는 아직도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만. 에베소와 사데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후 400 년에 사데는 고트족에 점령당했고 지금은 사르테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1820년 그곳에 있었던 마지막 선교사인 플리니 휘스크 씨는 그곳이 아주 비참한 곳이며 사람들은 모두 목축업자들이며 집은 진흙으로 지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데에 있던 교회에게 보낸 말씀과 심판의 날 이야기(마24장)을 그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시편 74편을 부르고 사데의 무너진 곳에서 기도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 주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르테 라는 그 비참한 마을에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데에서 별을 옮긴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가 여러분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것이니 어느 날 여행자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이곳에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려고 모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이제 사데에 있었던 그 몇 명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니라.” 우리는 단지 몇 명일뿐이지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친구들을 가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많은 가시나무들 속의 백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 주님께서 안티바를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거리들을 지나다니지만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기쁨을 돕는 자들이며 여러분은 우리의 기쁨이고 기쁨의 면류관입니다.

이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을 보겠습니다.

 

1.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존귀한 자니라.”

2.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3.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4.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우리가 여기서 입는 것이 같은 옷이며 저 세상에서 입게 될 것도 같은 흰 옷입니다. 모든 다른 피는 빨면 붉게 되지만 이 피는 빨면 흰 눈같이 희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닐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들로서 그와 함께 다닐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우리는 자녀들로서 그와 함께 다닐 것입니다. 그는 말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와, 주께서 제게 주신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형제들로서 그와 다닐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맏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남편으로서의 그와 함께 걸을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그의 왼 손이 제 머리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갈 것입니다.

죽어가는 기독교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무엇이 그렇게 기쁘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제가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떠나실 거야.” “아, 그때는,”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도 거기를 떠나 주님과 함께 있을래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우리의 진짜 천국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라.”

 

여기에 우리와 함께 앉았었고 지금은 그리스도와 함께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책에서 어떤 이름을 지우신 적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이기는 사람들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천사들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경건하게 보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너의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여러분들 중에 그리고 비난들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러분이 죄에 빠질 때 여러분을 보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기독교인들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아십니다. 그가 이기는 모든 자들을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여섯 번째 설교: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 계시록3:7-13).”

 

이제 빌라델비아 교회에 이르렀는데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아무런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납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흠을 보지 못한 또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 가운데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그의 눈조차도 책망할 아무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두 교회들이 아직 서 있는 것이 극히 놀랍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자기의 처음 사랑을 떠났고 지금 콩이 그 폐허 위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경계에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직도 서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누구든지 그가 그들을 지키리라는 것을 이 두 교회들로부터 보는 것은 대단히 놀랍습니다. 양쪽 교회들 모두 고난을 당하고 있었고 여전히 핍박들을 당해야 했습니다. 서머나는 자기들이 유대인들이라고 말하지만 아니고 사단의 회(會)에 속했던 자들이 있었던 곳이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그리고 빌라델비아에는 유대인들이라고 하지만 거짓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빌라델비아에는 현재 2,000명의 주민이 있고 800명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스무 교회들의 유물들이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다섯 장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누구든지 그가 그들을 지키십니다. 여러분은 불신자 기본(Gibbon)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빌라델비아는 아직도 서 있으니 유적지 중에 원주가 있다.” 불신자까지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증언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모습을 보겠습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이것은 요한 계시록 1장에서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자기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를 들었을 때의 환상에서 취해진 것 같이 보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는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결, 곧 그가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18절에 “내가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곧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는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갈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는 관대한 구주이시며 작은 일들을 그냥 넘어가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십니다. 그는 어떤 죄도 참으실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참으실 수 있으셨다면 그가 오셔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참으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 자신을 희생하신 그분 없이 그의 가슴에 안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참아내실 수 없으니 그는 거룩하신 구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구원 받는 것을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 오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 오십시오.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사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넘겨주어 죽으시게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구주이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그가 여러분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말하려는 의도를 가시실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값없이 담대하게 오십시오. 그는 참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기를 열망하는, 깨우침을 받은 영혼들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를 가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 안식을 주시는 분이 그분입니다. 이 기초 위에 여러분이 세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그는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이사야 22장 15절부터 끝 절까지 설명된 것을 보실 것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같이 맹렬히 던지되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이것은 왕의 국고를 맡은 셉나에게 보낸 말씀으로 그에게 말하기를 그의 직위가 빼앗기며 그는 포로로 잡혀가게 되며 그것이 엘리야김에게 주어지게 되어 엘리야김은 그 열쇠를 그의 어깨에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레위지파의 제사장직분이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엘리야김은 진정 단단한 곳에 박힐 못이 되어, 그에게 모든 것이 달리며, 그의 어깨에 다윗의 열쇠가 놓이게 될 그분, 곧 예수님을 예시하는 것이니 그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

 

당시에 사용되었고 아직 이집트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 열쇠는 우리가 사용하는 열쇠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추수하는 낫, 하늘에서 추수하는 낫과 같은 별들의 별자리 모양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목재로 만들어진 큰 열쇠입니다. 그것은 어깨 위에 메어 운반되었고 모든 걸쇠들과 빗장이 안쪽으로 있으며 열쇠는 속으로 밀어 넣어 거기서 그것들을 엽니다.

아가서에 말씀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한 가족의 가장이 자기의 어깨에 은이나 상아로 된 열쇠를 메어 운반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어깨 위에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은혜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섭리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영광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그는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셨습니다. 그는 교회에 관하여 모든 일들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은혜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문 앞에 오셔서 서시고 빗장들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아, 그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여러분의 마음 앞에 서계시는 지요! 그의 머리가 이슬에 젖을 때까지, 그의 머리털이 밤이슬에 가득할 때까지입니다. 여러분 중에 마음이 온통 문빗장들과 걸쇠들뿐인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결심하고 그리스도를 안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죄를 사랑하는 빗장이 있습니다, 자만과 허영의 빗장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빗장, 여러분들의 친구들을 두려워하는 빗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단지 은혜의 열쇠를 사용하시기만 하면 모든 걸쇠들과 빗장들은 활짝 열릴 것입니다. 지금 그가 여러분에게 자신을, 온전히 충만하고, 온전히 값없으며, 온전히 은혜로우시며, 하나님이신 구주를 나타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또 하나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니 섭리의 열쇠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고난들이 많다고 느낍니다. 문이 닫혔고 여러분은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심지어 사람의 분노를 자신을 찬양하도록 만드시며 남은 것은 그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아! 그를 의지하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를 들면, 우리는 이 도시에 새 교회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의지합시다. 힘 있게 전진합시다. 능력 있게 전진합시다.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전진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이 죽으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들은 전혀 알 수가 없도다! 그들은 외칩니다.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시간에 비로소 그 열쇠를 사용하여 여십니다.

이제 그 교회의 처지를 보겠습니다. 첫째로, 그 교회의 특징을 보겠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여행자들이 외국에서 스코틀랜드에 왔을 때 그들은 스코틀랜드를 형제사랑을 의미하는 빌라델비아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천 명에 목사 한 사람이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모든 가정이 주일학교였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필요하지 않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빌라델피아가 아니라 오히려 라오디게아입니다. 여행자들이 스코틀랜드를 보았을 때 빌라델비아라고, 은으로 된 궁전 같다고, 백합들 가운데 있는 밀밭 같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관하여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볼찌어다. 내가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이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문을 목사들에게 여시고 아무도 닫을 수 없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문이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한 다른 뜻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열린 문을 여러분에게 두셨습니다. 교회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 그리스도이셨으며 꼭대기 돌을 놓으실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여기서 누가 깨우침을 받았다면 그것을 행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지붕 밑에 있는 어떤 사람이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렇게 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만일 누가 가득한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렇게 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영광을 돌립시다. 그가 여러분에게 열린 문을 놓으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닫힐까봐 염려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 하였도다.” 단지 적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적은 믿음이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적습니다. 그처럼 믿음도 겨자씨 한 알처럼 아주 작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귀합니다. 은혜의 한 방울이 아주 적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귀합니다. 이 적은 능력이 아주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혼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적은 능력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적은 믿음의 한 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적은 일들의 날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적은 믿음을 가진 어느 사람을 볼 때에 이것 때문에 그들과의 사귐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고 내 말을 지키며.”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연합되었으면 여러분은 그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여러분이 인내하셔야 할 두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끝까지 지키고 싶으면 여러분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인내하면서 참고 견디십시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뜻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매달리십시오. 여러분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둘째로 여러분이 주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그의 임하심을 기다립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그가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나무의 뿌리들이 더 깊이 땅에 퍼질수록 그것은 그 가지들을 더 많이 뻗게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를 박을수록 여러분은 더 강하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게 됩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것입니까? 주님께서 이곳을 넓은 사데 가운데서 적은 빌라델비아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이제 약속들을 주목합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의 말씀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지키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이 시험하는 시대가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시험할 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때가 언제인지 저는 모릅니다만 저는 그것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 서 계십니다. 주님께서 1800년 전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지금은 확실히 “내가 곧 오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제임스 렌위크가 죽기 직전 한 말은 불길하니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교수대에서 죽은 사람들이 복되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붙잡읍시다. 강한 믿음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러한 때에 우리는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자,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단지 밤입니다. 단지 한 시간입니다. 단지 일 순간입니다. “내 백성아, 갈찌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우리들을 그리스도께 주신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니 아무도 그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상급을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저는 오히려 그 문지방에 앉아 있겠습니다. 저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오히려 제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있겠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안에 두 기둥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긴’ 그가 세울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것은 ‘보아스’ 그 안에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성전에 돌이 되는 것을 기뻐하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을 기둥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실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이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을 –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여기서 어떤 사람이 ‘나는 주님의 것이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의 사람은 자신을 야곱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기의 손으로 주님께 서명하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시게 될 그 때는 그것이 얼마나 확실하게 마쳐지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돈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사랑하는 것들에, 우리의 친구들에게 사로잡혀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저 성,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서 태어났노라고 우리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도들에게 가까운 것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임을 아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기를 우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성도들과 같은 성에 있게 될 것입니다만 하나님과 같은 집에 하나님의 권속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쓰실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그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아! 만일 구주의 이름이 우리 위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그의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위에 기록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위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우리 위에 그것을 기록하셔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거기서 우리 위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옛 이름인 임마누엘, 여자의 후손(씨)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때 그가 자신의 새 이름인, “만왕의 왕, 만주의 주”를 우리 위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면류관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깁시다. 싸울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둥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하나님의 성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우리 위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일곱 번째 설교: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계시록 3:14‐22).”

 

우리는 이제 일곱 교회들 중 마지막 교회, 가장 좋지 못한 형편에 있는 교회에 이르렀는데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교훈적이며 그렇게 위로를 주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일깨우기에 그렇게 적합한 곳이 성경의 다른 곳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일곱 편지들의 마지막에 이제 이르게 된 것이 저는 아쉽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바울이 그곳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그는 골로새서 2장 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그리고 4장 13절에서 그들에 관하여 다시 언급합니다.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주후 64년에 라오디게아는 지진으로 무너졌습니다만 다지 재건되었고 전보다 더 훌륭하게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3개의 극장과 동시에 30,000명을 수용했을 정도의 큰 원형극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서신을 그들에게 보낸 것은 94년이었습니다. 몇 년 후에 라오디게아는 두 번째 지진으로 무너져 그것의 폐허 속에 매장되었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고 아주 황폐되었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여행자들 중의 한 사람은 라오디게아가 이리와 늑대와 여우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들 모두에게 주신 자신의 말씀들에 얼마나 진실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취하신 모습을 보겠습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아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히브리말로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해 진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러분 중에 성령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약속은 오래 지연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너무 늦게 오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종류의 약속들을 하시는데 위협하는 것들과 위로하는 것들입니다. 자, 여러분 중에 자기들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에 진실하게 되지 않는 것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멘이십니다. 그가 아멘이란 말을 떼버리고 대신 거짓을 두시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위로하시는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위협하는 약속들에도 진실하실 것입니다. 그는 구주이신 동시에 멸하는 자이십니다. 그는 아멘이십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증언을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의 형편에 대해 참되게 증거하십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결코 알랑거리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처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실상보다 더 낫게도 더 나쁘게도 만드시지 않습니다. 그는 본성의 있는 그대로의 미술가이시지만 본성의 최고 미술가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밤에 여러분 중에 누구에게 나타나셨더라면 여러분이 떠나면서 말할 것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관하여 참된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안에서 본 것에 대해 증거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죄인들을 향하여 무엇이 있는지를 증거하십니다. 그가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얼마나 원하시는지요.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영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안식은 없으니 그것이 안식인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영혼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십니다. “내가 나에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내 증거는 참되니라.”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하여 증거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증거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만드시는 자신의 견고함에 대하여 증거하십니다. 그는 학자의 혀를 가지셨고,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 아심을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오히려 주권자나 권세자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해와 달로 그들의 금빛 경주를 하도록 세우시고 별들을 불빛과 함께 두신 이가 그리스도이십니다. 땅을 함께 모으고 강들을 만드신 이가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작품임을 아는 것이 창조를 더욱 감미롭게, 나무들을 더욱 감미롭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밟고 있는 세상에 대해 더욱 확신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지진이 오는 것을 두려워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산들을 만지시면 연기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모습을 취하신 것은 “내가 처음 지진을 보냈다. 그리고 만일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또 다른 것을 보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위한 것 같습니다.

 

그 교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 교회는 두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니 미지근함과 자기 의(義)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특징에 가장 적합한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들 중 첫째인 미지근함을 다루겠습니다. 세 가지 특징들이 언급되었습니다.

첫째 차가움, 차가운 사람들은 누굽니까? 얼어붙은 사람들, 얼음조각인 사람들, 어떤 열기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몸은 차갑고 움직이지 않고 손은 냉습하고 죽음의 찬 이슬이 이마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차갑고 죽은 영혼은 더욱 비참합니다. 갈리오는 이러한 일들 중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아무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많은 갈리오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죽은 영혼들이 있으니 그렇게 많은 부패함이 있는 것이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이상한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 보호받는다는 것이니 만일 성령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 생명이 없게 될 것입니다.

둘째, 미지근함입니다. 미지근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예식에 있어서 충실하며, 안식일마다 교회에 오고, 세상에서 충실한 사람들이며, 기독교인들이 되겠다고 거의 설득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라리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중에 신앙의 뜨거움과 같은 것을 조롱하며 열성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여러분 중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까? 상한 심령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죄의 사함에 대해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미지근한 사람들이니 돌아오십시오. 돌아오십시오. 왜 죽으려고 하십니까?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 이른 적이 없이 천국 문에 거의 이르렀던 사람들은 방탕한 죄인들보다 지옥 안의 더 깊은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뜨거움입니다. 뜨거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항상 불이 붙어 있는 스랍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주십니다.

이제 특징의 다른 면, 곧 자기 의를 살펴보겠습니다. 미지근함과 자만은 항상 함께 갑니다. 제가 오늘 밤 말한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 중에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 자기 의를 내세우는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감미로운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결코 위협만 하시지 않습니다. 위협하신 후에 권고가 따르고 그것 후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이여! 그가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여러분은 자신들이 부자라고, 재산이 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부하게 되는 것이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이라면 그때 여러분이 재산에 있어 불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 1장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지이고 여러분의 모든 의는 헤어진 옷과 같습니다.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러분이 오늘 밤 집으로 돌아갈 때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한데 목사가 우리더러 비참하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야? 우리가 가난하다고, 우리가 아주 잘 보고 있는데 우리더러 소경이라고 말하니 무슨 소리야? 그러나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아셨으니 그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거만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겸손하고 온유하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거만할지라도 그는 여러분에게 권고하시며, 조언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이나 혹은 그리스도 중에 누가 더 지혜롭습니까? 그가 여러분에게 자기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충고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금은 불속에 있었으며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던져졌었으니 천국의 정금입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자기에게서 흰 옷, 땅에서 그보다 더 완전하게 그들을 희게 할 수 없는 옷을 사라고 권면하십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것을 여러분이 손닿는 곳에 두셔서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다른 것을 제안하십니까? 예, 저는 주님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데 이 안약은 기쁨의 기름, 주 예수님의 성령입니다. 이제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밤에 여러분을 이것으로 바르시면 그것이 여러분의 눈을 밝게 할 것이고 여러분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말할 것입니다.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제 예수님의 약속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자기에게서 사라고 권하는 시장에 있는 상인과 같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집으로 갔고, 저녁시간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자기 물건을 사기를 바라면서 따라가십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니, 이렇게 오히려 되어야 합니다. ‘내가 문에 줄곧 서 있었고 아직 서 있는 중이다!’

전체 성경에서 이것보다 더 감동적인 구절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 문에서 오래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 안에서 그것을 두드리십니다. 그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는 경건한 친구들에 의하여, 경건한 부모들에 의하여 여러분의 문에서 두드리십니다. 그는 목사들의 설교를 통하여, 이제 자기들의 안식으로 들어가서 자기들의 면류관을 즐기고 있는 목사들에게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간 말씀을 통하여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여러분을 만난 섭리들에 의해서, 잃어버린 친구들에 의해서, 여러분에게서 취해간 여러분의 양떼 중의 가장 아름다운 꽃에 의해서 두드리십니다. 여러분은 그것은 너무 거친 손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손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였으니 그가 세상에게 하시는 방법과는 달리 여러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에게 구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이 일곱 편지들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 계셨습니다. 그는 자기 머리에 이슬이 가득할 때까지, 밤이슬이 그의 머리털에 가득 할 때까지 서 계셨습니다. 그가 자기의 피에 의해서 그리고 자기의 눈물에 의해서 호소하셨습니다. 자,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신다면 그가 무엇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시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할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식사 때마다 여러분과 함께 앉으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떡을 먹으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아시아 일곱 교회들의 마지막에 이르렀고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이 다정한 말씀, 자비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 모두로 증인을 삼고자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번역 : 이강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