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Murray M’Cheyne: The Family of Bethany

from Additional Remains of the Rev. Robert Murray M’Cheyne

n.d.(perhaps late 1800’s) Edinburgh: Oliphant Anderson & Ferrier

번역: 이강호 목사

 

 

베다니 가족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요한복음11:1-4).”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질병은 돌아다니며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느 가정도 아끼지 않습니다. 때로는 젊은 사람들, 때로는 나이 많은 사람들, 때로는 혈기 왕성한 사람들도 병석에 눕습니다.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질병을 보내시는 이유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1) 어떤 사람에게는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보내집니다. 때로 건강할 때에 말씀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세상이 전부입니다. 세상의 환락, 그것의 즐거움, 그 동경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러분을 병상으로 끌어내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의 죄, 세속적인 쾌락의 헛됨을 보여주시고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토록 확고한 안식처로 몰아가십니다. 오,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된 질병이여(욥33장, 시107편)! 2) 때때로 그것은 친구들의 회심을 위해서 보내집니다. 언약도들이 싸우러 나갈 때 그들은 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기도들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주여, 익은 것을 취하시고 익지 않은 것은 남겨주소서.” 하나님께서 때때로 가족들 중에서 이렇게 행하십니다. 그는 나머지 사람들로 생각하고 돌이켜 기도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아이, 반은 놀림 받고 반은 이상하게 여김을 받는 아이를 치십니다. 3) 때때로 그것은 심판의 찌푸림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성경의 빛과 목사들의 경고에 대항하여 계속 죄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들에게 찌푸리시며 그들은 갑자기 시들어버립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4) 또 하나의 경우가 이제 우리 앞에 있으니 하나님의 자녀의 병든 경우로써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영광을 얻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I. 상황 – 그 사람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 나사로라.”

나사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은혜에 이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이 전에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 가족 중에서 마리아가 처음 주님을 알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누가복음10장). 그리고 마르다가 그녀의 “많은 일”을 버리고 주님 발 앞에 와서 앉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자매는 자기들의 형제인 나사로도 오라고 설득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는 경건한 가족 중에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영광을 향하여 가는 베다니의 복된 가족이여! 하지만 질병의 손이 임하였으니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자”(3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요한과 같이 나사로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죄인이었으나 예수께서 그를 씻기시고 새롭게 하시면서 아마 그에게 다른 신자들보다 자신의 형상을 더 많이 그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지만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1) 이것으로부터 환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배우십시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틀림없이 위선자요 못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치신다고 욥에게 알리려고 힘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자식들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았고, 히스기야는 죽음에 이르도록 병이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께 특별히 귀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실 때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만 그는 나사로를 매우 심한 고난을 주셨습니다. 의사는 란셋을 집어넣고 상처를 밑바닥까지 조사할 때만큼 환자에 대해 아주 부드럽게 그의 눈을 집중하는 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가 자기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때 그의 눈은 가장 부드럽게 그들을 향해 들여다보십니다. 그가 여러분에게 무거운 손을 내려놓으실 때 여러분의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고난을 주실 때 그는 나사로를 덜 사랑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더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2) 금 세공인은 금을 노(爐)에 집어넣을 때 그 뒤를 지켜봅니다.

 

2. 장소 –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마일 정도 떨어진 감람산 후면의 골짜기에 있는 아름답고 동떨어진 마을입니다. 거기는 오늘날 무화과나무들과 아몬드나무들과 석류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리스도의 눈에 더 큰 사랑스러움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곳은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루살렘의 세속적인 사람들은 베다니를 거기에 자신의 시골 저택을 가지고 있던 어떤 부유한 바리새인이나 혹은 자기의 이름을 따라 그 땅들을 불렀던 사치한 귀족의 촌이 되는 것에 의하여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단지 “마리아와 그의 형제 마르다의 촌”으로 아셨습니다. 아마 그들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초라한 작은 집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집은 예수님께 귀했습니다. 그가 감람산을 넘어오셔서 다가가실 때 자주 그 작은 집 창문의 불빛은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자주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대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아버지께서 그들의 거처를 사랑하셨으니 왜냐하면 이들이 의롭게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밤낮 거기서 구원의 세 상속자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장소를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이라고 불렀던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니 그것은 하늘에서 그곳의 이름이었습니다.

그것이 여전히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우리의 읍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그곳을 어떤 부유한 상인, 혹은 공적인 일들에 지도자, 사람들의 친구라고 허세부리는 어느 대단한 정치인의 읍으로 부르고, 또한 어느 부유한 귀족이 살고 있는 곳의 가까운 읍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우리의 읍은 마르다들과 마리아들의 읍으로써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훌륭한 자녀가 살고 있는 가난한 작은 방이 이 읍에게 예수님 앞에서 그곳의 이름과 관심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자들이여, 여러분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그는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읍을 아십니다. 여러분이 사는 집을 아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방을 아십니다. 자주 문 앞에 서 계시고 자주 그의 손을 문구멍으로 밀어넣기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신랑이 신부가 사는 곳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주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내가 위하여 죽은 자들이 산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배우십시오. 상인이 세계지도를 볼 때 그의 눈은 자기의 배가 항해할 곳들을 향하며, 군인은 옛 전장들과 요새화된 읍들의 자취들을 바라보지만 신자는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그는 신자들이 살고 있는 곳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3. 메시지

1)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것이 병이 났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의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은 육체적인 문제가 그리스도의 주요 관심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그는 “필요한 한 가지”를 그들에게 가르쳤었고 마리아는 자기에게서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몸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모든 종류의 탄식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리려고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50:15) 너무 커서 그리스도께 가져가지 못할 근심이 없고 너무 작아서 가져가지 못할 근심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너의 짐을 주께 맡겨 버리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예수님께 가져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혼으로만 믿지 육체로는 안 믿고, 구원으로는 믿지만 자기들의 건강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지극히 작은 시련들 중에 청함을 받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2) 주장. 만일 세속적인 사람이 그리스도께 보내어진다면 그는 전혀 다른 진술을 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기에 세상 앞에서 당신을 시인하는 자, 당신을 위하여 모욕과 비난을 당하는 자가 있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간청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제안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1) 택하시는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부터 조건 없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2) 인도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는 진노로부터, 죄를 섬기는 데로부터 그를 끌어내셨습니다. (3)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를 자신에게 이끄시고 그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4) 붙들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주 외에 누가 나를 붙들어 주리요?” 당신이 위하여 죽은 자, 당신이 택하시고 씻어주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자, 곧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는 신자들이여, 그리스도께 이와 같이 청원하기를 배우십시오. 때로 여러분이 올바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때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거만하게 구합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주시면 단지 여러분의 정욕을 배불리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티끌에 누워 그의 값없는 사랑만을 구하십시오. 제 안에 선한 것이 없음에도 주께서 저를 사랑하셨나이다.

 

택함을 입은 것은 내 속의 선이 아니라네.

진노에서 피하라고 일깨움을 받고

구주의 옆구리에 숨어들었네.

성령으로 거룩히 되어.

 

주의 사랑을 부인하지 마시옵소서. “주의 손의 일을 기억하소서.”

 

3) 기도 속의 거룩한 고상함. 그들은 문제를 그의 발아래 내려놓고 거기에 두었습니다. “오셔서 그를 고쳐주소서. 속히 오소서, 주님.”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의 사랑을 압니다. 그의 지혜를 믿습니다. 그들은 그의 손에 문제를 맡깁니다.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주시니.”(마15:30) 그들은 간청하지 않고 그들의 비참이 간청하게 했습니다.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직역-너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아시도록 해라).” (빌4:6)

기도에 있어서 긴급함은 열렬한 믿음에서처럼 열렬한 청원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기도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을 받을 것입니다. 진실로 성경은 여러분이 모든 주장들을 사용하는 것이나 병든 친구들을 위한 치료와 같은 분명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막 5:23)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 기도에 있어서 거룩한 고상함이 있으니 어떤 신자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압니다. 이 두 자매들같이 그 대상을 그의 발 앞에 놓으며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하십시오.

 

4. 응답.

1) 약속의 말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이것은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오시지도 않았고 고쳐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심부름꾼이 달려 요단강을 건너고 해지기 전에 숨을 몰아쉬며 베다니 마을에 들어섭니다. 근심어린 얼굴로 그 자매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어떤 소식이 올지 들으려고 뛰어나옵니다.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감미로운 약속입니다! 자매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의심 없이 그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죽어가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약해집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눈물을 통하여 그의 창백한 뺨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거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드디어 나사로가 울고 있는 누이들 곁에서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그의 눈이 몽롱해집니다. 그의 뺨이 차갑습니다. 그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라.” 친구들이 시신을 돌무덤으로 운반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그 자매들이 무덤을 떠나면서 그들의 믿음이 죽어갑니다. 그들의 마음들이 완전한 절망에 잠깁니다. 그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일까?

보는 것이 어떠한 것을 말하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기를 배우십시오. 우리는 어두운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구름이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고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적들이 격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대적들이 점점 필사적이 되어갑니다. 그리스도의 대의가 어디서든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미로운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더 어두운 때가 오고 있습니다. 구름들이 돌진하고 불신앙의 홍수가 곧 스코틀랜드를 잠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처럼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교황주의는 맷돌처럼 가라앉게 되고 – 과부되는 것과 자식을 잃는 것이 그들에게 한날에 임할 것입니다. 다시스와 섬들의 왕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원수들을 그의 발밑에 놓을 때까지 통치하실 것이고 온 세상은 곧 진정한 안식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2) 설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렇다면 나사로가 왜 병들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뛰어난 방식으로 알려지시게 되었습니다. (1) 자기 사람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이 알려졌으니 그는 그의 무덤에서 우셨습니다. (2) 죽은 자를 살리는 그의 능력이 알려졌습니다. 그가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실 때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가 병들거나 죽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질병에도 그와 같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자녀는 말합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제가 당신을 위하여 가르치고 전파하고 큰일을 하겠습니다.” 때로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리라.”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가 보이는 것은 고난의 때에 평안을 주며, 질병과 궁핍과 핍박과 죽음 가운데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고난당할 때에 놀라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것은 건강할 때에 볼 수 없었던 은혜들을 드러냅니다. 포도를 밟는 것이 포도의 감미로운 즙을 내게 합니다. 그같이 고난은 순종과 세상으로부터의 격리와 하나님 안에 완전한 안식을 끌어냅니다. 여러분에게 고난들이 있을 때 그것들을 사용하십시오.

 

 

 

 

베다니 가족 2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한복음 11:5-10).”

 

I. 예수님의 사랑: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 이는 요한의 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에게 무엇을 기록할지 가르쳤으며 그는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었었고 예수님의 마음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들이 예수님께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전갈을 보냈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염치없는 전갈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진실로 회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 예수님께서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러나 여기서 요한은 자기의 증거에 확증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것은 정말 참된 것이고 그 안에 상상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알리는 독특한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의 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랑을 영혼들에게 알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한 가지를 제가 언급하겠습니다. 영혼을 자신에게 이끄심으로 알리십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31:3).”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겔16: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6:44).” 주 예수님께서 죽어있고 세속적인 죄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아름다운 자신의 얼굴 모습과 자기의 날개아래 있는 자리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 그리고 영혼이 옛 죄와 옛 방식에서 멀어질 때, 그 죽어있음과 어두움과 세속적임을 떠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 예수께 달려가라고 설득을 받을 때, 그때 영혼은 믿는 평화의 맛을 보게 되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이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세속적이며 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누이들이 어린양을 주의 깊게 영접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저는 때로 그들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제게 오셔서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의 탁월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저를 이끄셨고 이제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가 여러분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도록 이끄셨고, 여러분 자신의 의를 버리고,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의 세속적인 친구들을 버리도록,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을 버리도록 이끄셨다는 이러한 사랑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좋은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가족을 사랑하셨습니다. 가족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빛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더 그리스도께 가깝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가족 중에서 가장 천국적인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 그녀가 처음으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마르다가 여러 가지 봉사로 인하여 분주할 때 그리스도의 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자기의 자매보다 이 시험하는 섭리아래서 드러나게 더 겸손했습니다. 그녀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또한 더 생생한 감사로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아주 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붇고 자기 머리로 그의 발을 씻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습니다. 그녀는 사랑이 충만하고 배우기를 잘하고 온유하고 조용한 마음을 가진 아주 특별한 신자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들 사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녀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연약한 식구일지라도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습니다.

약한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바울이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야. 예수님께서 나를 돌보시지 않을 것 같아.” 답. 그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위하여 죽은 가장 약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어머니가 그 모든 자녀들을, 약하고 병든 자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돌보십니다. 많은 의심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 무거운 짐과 시험이 있는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되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14: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 우리 가운데 마음에 적대감이 있을까 저는 걱정스럽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마르다들과 마리아들과 나사로들을 사랑하는지 염려합니다. 여러분은 특별히 기둥 같은 사람들을 높이 존경합니다. 그러나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낮아질 수 있습니까? 낮게 꾸푸리기를 배우십시오. 약한 자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들을 혹평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일상적인 이야기의 주제가 저들의 결점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저들의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충고로 그들을 돕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II. 그리스도의 지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으나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상반되는 구절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으셨고 급히 베다니로 가셨다.” 이것이 사람의 사랑 방식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지체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다정하게 사랑하는데 그가 병들었다고 들으면 달려가서 보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베다니 오두막에 이틀은 매우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자기들의 형제를 다정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오기를 시간마다 기다렸습니다. 마르다가 아마도 불안해지기 시작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늦으시는 거야? 오시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릴까? 무엇이 그를 붙들고 있는 걸까?’ 마리아가 말했을 것입니다. ‘걱정하지마. 그분이 나사로를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는 줄 너도 알잖아. 그가 참되신 줄 너도 알잖아. 그가 말씀하셨어.’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은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 그들의 애정어린 가슴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두 자매는 낙심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는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그러하셨으니 그는 그녀를 돕는 일에 지체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다루시는 일이 여전히 그러하십니다. 그가 사랑하시지만 때때로 그런 방식으로 지체하십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지체하신 이유들은 무엇입니까?

 

1.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을 보십니다. 세상의 근원부터 그의 모든 일이 그에게 아신 바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안 계셨지만 그는 베다니의 병든 사람의 방에 계셨습니다. 그는 그의 창백한 모습의 모든 변화를 보셨고 모든 약한 탄식을 들으셨습니다. 마리아의 뺨을 흐르는 모든 눈물을 그는 보고 계셨고 자신의 병에 담으셨고 그의 책에 기록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장래가 또한 그 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시고 하셔야 하는 일을 아셨으니 무덤이 죽은 자를 내놓을 것이며 그가 곧 저들의 탄식을 기쁨의 노래로 변하게 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계신 곳에서 머무신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기의 성도들을 도우시려고 지체하시는 때에 여러분은 이것이 커다란 수수께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끝을 보십니다. 잠잠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아십시오.

 

2. 그들의 믿음을 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붙잡을 약속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의 심부름꾼에게 말씀을 보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이것은 그들이 붙잡기에 쉽고 단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 심하게 시련을 받았습니다. 그가 점점 악화되자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약속에 매달렸습니다. 그가 죽자 그들의 믿음도 죽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였고 그같이 그들의 믿음은 나중에 커졌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모든 상황들이 자기들을 대항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바다 위에서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항해할 때 그는 잠이 드셨습니다. 여기에 그 폭풍 속에서 붙들어야 할 단순한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다가오고 파도가 배를 덮칠 때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가 말씀했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 시련으로 그들의 믿음은 그 이후에 크게 커졌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들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실 때에 그는 항상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나무의 뿌리가 바람과 싸울 때 더 굳게 잡듯이 믿음은 역경과 싸울 때 더 굳게 잡습니다.

 

3. 자신의 도움을 더 빛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오셔서 그들의 형제를 치료하셨더라면 우리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보이신 그 사랑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에서 살리시는 위대하신 구속자의 큰 권능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밝은 빛남은 교회와 세상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틀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와 같이 그의 이름의 영광이 멀리 넓게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위하여 내가 지었나니 나의 찬양을 부르게 함이니라.” 이것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신 목적이니 곧 그가 보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애굽사람들을 멸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시간을 지나치는 것 같이 보일 때 그를 기다리십시오. 그는 오실 것이며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이유를 알든 모르든 그는 그렇게 하시는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지체하실 때에도 그는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마디도 답하지 않으셨을 때에도 그 여인을 사랑하셨습니다.

 

III. 그리스도의 결정.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1. 때: “그 후에” 이틀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돕지 않고 정한 시간을 기다리십니다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는 아모리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그들의 잔이 찰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를 정한 시간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오, 악한 사람이여! 당신이 채울 분량이 있으니 그것이 차면 당신은 즉시 지옥으로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모래가 다 흘러내리면 당신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같이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오시는 시간을 정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2)

(1) 회심에 있어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7)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있는 권세로 영혼을 깨우치실 때 그는 평안에 이르게 하는 자신의 정한 시간과 영혼의 인도 방식을 취하십니다. 때로 죄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데 그렇게 오래 되어야 하는 것이 아주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그는 실망하며 자기 경우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명심하시고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2)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에 대해 바라는 청원들을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자신의 권세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응답의 시간에 있어서 매우 주권적이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리스도께 자기들의 청원을 보냈을 때 그는 그들에게 즉각적인 약속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그들이 기다렸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자주 우리에게 우리 마음의 소원을 주시는데 우리가 바라던 그 특별한 시간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때에 주십니다. 기도를 올리는데 있어 싫증내지 마십시오. 친구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티끌에 누울 때에 그 기도들이 응답될 수 있습니다.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그는 가장 좋은 시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3) 자신의 두 번째 영광스러운 오심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오래 전에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잠깐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아직도 그 시간이 늦춰지고 있습니다. 신랑이 지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그는 무한히 지혜로운 절기, 그리고 자신이 오셔야 하며, 하늘이 열리고, 자신이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2. 반대. 반대는 전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와 그들에게 위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때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반대를 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시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경건한 사람들도 얼마나 이기적인가요! 제자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괴로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친구인 나사로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을까봐 두려워했고 그것이 그들로 고난당하는 가족의 처지를 잊게 했습니다. 가슴에서 이기심보다 깊은 뿌리는 없습니다. 그것을 대적하여 기도하고 깨어있으십시오. 경건한 사람들도 때로 선하고 옳은 일에 있어서 여러분을 반대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유대로 다시 가자고 제안했을 때 제자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제안에 놀랐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을 때, 특별히 그것이 고난을 받도록 부름 받은 일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3. 그리스도의 답변. 그리스도는 여기서 의무의 길을 낮의 빛에 걷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낮의 빛에 다니면 넘어지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미소와 임재를 가지고 있는 한, 그는 낮 빛에 걸어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그의 발을 굳게 내딛고 앞으로 담대하게 나갑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세속적인 지혜에 끌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물러서면 그는 어둠을 걷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가 빛이 없으므로 넘어졌느니라.”

오, 믿는 여러분들이 그가 여러분을 부르시는 어디든지 담대하게 예수를 따라가리라고 결심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자라면 때대로 물러섰으면 하고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좁고 때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여러분을 두렵게 합니까? 여러분의 양심에 그리스도의 피를,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셨습니까? 낮에 열두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모두 죽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베다니 가족 3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한복음 11:11-16).”

 

I. 죽은 나사로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1. 그는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릅니다. 어떤 이름 있는 불신자가 성경에서는 애국심이나 우정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을 모르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기독교신자인 시인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 사람과는 얼마나 다른 인식을 가졌는지요!

이제까지 알려진 가장 고상한 우정을

구주의 역사는 알게 했다네.

아! 여호와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벌레와 같은 우리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진정한 우정은 상호간의 신뢰와 상호간의 희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같이 하나님은 에녹을 대해 주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했으며.” 에녹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와 벌레 사이의 놀라운 우정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세 번 그는 하나님의 친구로 불립니다. 대하20:7, 사41:8, 약2:23.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켜서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겠느뇨?”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7) 그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같이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출33:11,1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출34:34).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대해 주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어린양이셨지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그는 절친한 우정으로 그들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만찬 때에 그의 가슴에 기대었고 누구는 향기름으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슴 안에서 배운 모든 것, 그들이 듣기에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숨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대해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같이 그는 나사로를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 때때로 그들은 무화과나무가 늘어진 오두막집 아래서 앉았고 그리스도는 영원한 세상의 영광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이 초대된 곳이 바로 이곳이니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친구들을 선택할 때 대개 돈이 많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재주 많은 사람을 고릅니다. 자기들을 다시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 젖먹이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친구로 삼으십니다.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세상은 친구들을 바꿉니다. 세상에서는 만일 돈 많은 친구가 가난하게 되면, 만일 갑작스러운 실패에 넘어져 깊은 가난에 빠지게 되면, 친구들은 빗속의 나비들처럼 재빨리 자기 집으로 날아갑니다. 그들이 마치 여러분을 보지 못한 것처럼 냉담하고 낯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니 형제보다 더 가까이 붙어있는 친구입니다. 진실한 친구는 다른 사람이 알아서 유익한 것을 그에게서 아무 것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숨기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2. 죽었을 때에도. “우리 친구 나사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거의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나가서 다시 오지 않는 바람”입니다.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7:10). 제가 가 보았던 어떤 나라들은 도시들이 있었던 곳에 거대한 매장지가 있는데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그들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이에서도 얼마나 빨리 죽은 사람들이 잊혀지는가요! 그들이 살아있을 때는 여러분이 그들을 무척 사랑했으나 – “그들의 살아있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명랑하고.” – 하지만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마음에서 쉽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은 잊혀지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형제자매들의 잠자는 티끌을 마음에 두는 신실한 맏형 한 분이 계십니다.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변하게 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그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그의 흉패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아, 나의 친구들이여! 이것이 죽음에서 쏘는 것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세상에게 잊혀질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면 세상은 여러분을 결코 사랑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사라질 때 기뻐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설교들은 세상의 눈에 즐거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흙 속에 누울 때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신자들도 여러분을 잊을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피조물이고 기억은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모두 안디바를 잊어버렸을 때 “내 충성된 증인(순교자) 안디바.”(계2:13)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잠자는 자신의 모든 성도들을 잊지 않으시고 자기와 함께 저들을 데려오실 것입니다.

 

II. 실수 (12,13절)

지난번 강론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이기심의 단면을 보았는데 여기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그들이 사랑스러운 제자들이었으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고, 진실하게 그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성품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두움의 잔재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잠들면 낫겠나이다.”

 

1. 잠을 자는 것은 구약에서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같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너희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다니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띠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왕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과 함께 잘 때에” 삼하7:12. “이제 내가 흙에 누우리니(자리니)” 욥7:21.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정말로 그들이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그 의미를 알아냈을 것입니다.

 

2. 휴식의 잠에서 그를 깨우러 갈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사람을 깨우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처럼 그들이 자기들의 스승을 가볍게 생각했단 말입니까?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오해했다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들이 전에도 그리했고 또 그러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실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하며, 특별히 빛을 위하여 그에게 가서 그의 말씀의 의미를 꾸준히 찾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어둔 방에서 독서하며 매우 어려운 부분에 이를 때는 더 밝은 빛을 얻으려고 창가로 가져갑니다. 그와 같이 성경을 그리스도께 가져가십시오.

저들의 실수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답,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유대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에 맞을까봐 무서워했습니다. 자기들의 주님께서 가려고 하시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말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뜻에 대한 자기들의 마음의 싫어함 때문에 그의 말을 오해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모든 어둠의 큰 이유입니다. “마음의 어둠을 인하여”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하려하면 그는 교훈을 알리라.”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잃어버린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며, 말씀이 어렵기 때문도 아니며(성경은 평범하고 단순한 책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대한 책망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선함과 안락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용서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길과는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의를 누더기로 여기고 오직 그분의 의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성도들이 여러분의 의무에 대한 규칙이 명백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의무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반대하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경우였습니다. 이것이 결혼이 이루어질 때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하인이 장소를 정할 때 일어나기도 합니다. 한번 강한 욕구가 마음에 형성이 되면 그것은 성경에 대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오, 여러분이 그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모든 기쁨으로 주님께 합당하게 걷기 위하여 순전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III. 설명. (14,15절)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두 가지를 설명하십니다. 첫째, 자신의 말씀; 둘째 자신의 부재.

1. 예수께서 솔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의 제자들은 대단한 이기심 – 마음의 거대한 흑암 – 큰 어리석음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시거나 쫓아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평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가르치실 때 그는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마13:51. 다른 때에 그가 아버지의 집에 대해 그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동일한 놀라운 인내와 부드러움을 가지시고 그는 말씀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그는 무지한 자들과 길을 벗어난 자들에게 동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죽어있음과 무지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어둔 눈을 그에게 가져가십시오. 그가 빛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자신의 길과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2. 그는 자기의 부재를 설명합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반문이 즉시 제자들의 가슴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면 왜 주님께서 이틀을 머무셨을까?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셨더라면 그가 나사로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거기에 계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의 오두막집에 서서 자신의 죽어가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마리아의 조용한 눈물을 볼 수 없으셨을 것이고 자기들의 소원을 내지 않고 마르다의 간청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기뻐하노니.” 아, 자기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배우십시오. 그는 저들의 기도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그는 말합니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출32:10)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기도하는 한 이스라엘을 멸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같이 하나님께서 멸하시려고 할 때에 그들이 기도할 수 없도록 막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의해 지지 않으시려고 멀리 떨어져 계셨습니다. 믿는 마리아의 올린 손은 예수님께서 거절하시기 어렵습니다. 진실한 신자의 젖은 눈은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아6:5) 그러나 왜 그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지난 번 강론에서 우리는 베다니의 오두막 집 사람들을 위하여 지체하셨음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고후4:15. 신자들을 위하여 이 세상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해가 낮을 주관하고 달이 밤을 주관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별들이 그들을 위하여 지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을 위한 존재로 보존됩니다. 바람이 일어나고 가라앉고 파도가 흉흉하다가 잔잔해지고 계절이 바뀌고 파종기와 결실기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만물의 너희 것임이라.” 모든 사건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나라들이 흥하고 망합니다. 국가들은 그의 막대이고 영원한 복음의 길을 깎아 내는 그의 톱과 도끼입니다. 레바논에 있는 히람의 장작 패는 사람도 기브온의 물 긷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적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막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막대를 둘로 꺾어 버리실 것입니다. 특별히 믿는 가족들에 대한 모든 섭리들은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가족을 다루실 때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 내가 그것과 무슨 상관이야?” 라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아, 진실로 만일 여러분이 세상에 속했다면 여러분은 그것에 아무런 지분이나 몫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여러분을 위한 것이니 여러분으로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믿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하심들은 대단히 교훈적이니 그의 고난과 평안이 그러하며 그의 방식인 것입니다.

오, 여러분이 믿도록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치시는 손이 많은 것을 보니 서로 서로의 짐을 지기를 배웁시다!

그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 외에는

아래서 자라는 나무가 없으리니,

그의 보좌에게서 나온 명령에 따라서

천둥 치고 폭풍이 분다네.

 

IV. 열성적인 제자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도마였으니, 믿지 못하는 도마였습니다.

 

1. 여기에 그리스도를 향한 참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가려고 결심하신 것을 보았고 위험을 보았고 비용을 계산했습니다. 자, 우리도 가자,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태하게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얼마나 많은 기간 동안에 그러했었는지요!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스코틀랜드는 도마와 같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라고 말한 얼마나 많은 구름 같은 증인들을 보았습니까! 아, 만일 우리가 죽기까지 그를 좇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열심. “함께 가자.” 그는 베드로처럼 “내가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함께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의무의 길을 분명하게 이해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우리와 함께 가자고 설득해야 합니다. 신자가 홀로 길을 가는 것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가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오라, 함께 여호와께 함께 가자.” 렘 50:4. 그같이 모세가 호밥에게 그랬습니다. “함께 가자.” 회심한 이방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오, 이스라엘 집이여, 와서 여호와의 빛에 함께 행하자.” 그리스도인은 강과 같아서 흐르면서 윤택하게 하며 배와 그 가운데 떠있는 모든 것을 나르며 바다까지 데리고 가야 합니다.

3. 하지만 그것과 섞인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는 것에 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족하지 않을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불신이 가득하고 두려움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죄와 약함이 어떻게 우리의 사랑과 열심과 혼합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거룩한 일들의 범죄를 지시는 분에게서 얼마나 무한히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배웁시다.

 

 

 

베다니 가족 4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 11:17-27).”

 

I.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려 나가시는지 살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귀먹고 벙어리된 한 사람을 고쳤을 때 무리가 외쳤습니다. “그가 모든 일을 잘하였도다.” 아, 이것이 정말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사실입니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만물의 머리라.” 지옥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죽으신 그는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3,4)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동일한 손이 대각성(大角星)과 묘성(昴星)을 내시고 태양을 자기의 길로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의 놀라운 예가 여기에 있습니다.

 

1. 시간적인 측면에서: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7절)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예수께서 들으셨을 때 그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천천히 조용히 길르앗 산의 외진 골짜기를 떠나서 요단 강을 건너 사흘째 되던 날에 베다니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감람산의 그늘진 골짜기는 어둠침침한 모습을 가졌습니다. 마을은 조용하고 정적이 흘렀고 아마도 나사로의 오두막 문 주변에 여러 조문객들이 땅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마치 깊은 비탄의 현장에 끼어들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좀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오늘이 나사로가 죽어서 차가운 돌 무덤에 누워있는지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쳐다보고 놀랍니다. 죽은 지 나흘이라니! 주님께서 왜 지체하신 것일까? 왜 우리가 요단강 건너편에서 이틀이나 그냥 허비하였을까? 자매들도 또한 예수께서 너무 늦게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상해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 시간에 오셨습니다. 그가 늦게 오셨다면 애정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잊혀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빠르게 죽은 자들을 잊어버립니다. 그가 더 일찍 오셨다면 나사로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적합한 시간에 오셨습니다. 그는 모든 일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정하십니다. 그는 모든 일을 잘 하십니다.

 

2. 장소적인 측면에서: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우니” 이러한 은혜를 나타내는 이적의 장소는 무한한 지혜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베다니는 도시의 북적거림과 소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그늘지고 동떨어진 골짜기의 외진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동정과 사랑의 부드러운 감정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울며 탄식하는 것을 사람이 북적대는 도시 한 복판에서 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다니는 약 2마일 되는 곳에 있어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많은 유대인들이 목격자로 있었고 그 소식이 몇 시간 안에 도시에 옮겨져서 온 예루살렘과 유대에 퍼졌습니다. 그것이 한 구석진 곳에서 된 일이라면 사람들이 조롱하며 부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한시간 거리에서 된 일이라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적을 행할 곳을 지혜롭게 잘 선택하셔서 모든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드러내도록 하십니다. 그는 향유옥합을 깨뜨릴 장소를 선택하셔서 그 향기가 아주 넓게 퍼지도록 하십니다.

 

3. 증인들 측면에서: “많은 유대인”(19절). 45,46절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들에게서 아주 먼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시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친구들이었고 진지한 행위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난의 시간에 그들에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위로를 주려고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의 가슴에도 얼마의 본성적인 친절함은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도착할 바로 그 시간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 친구들이여! 그는 모든 것을 잘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에게 행하시는 방식에 때로 이상해하고 때로 불평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의 것이라면 그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여러분의 선을 이루시며 그의 영광을 이루시게 하시기를 배우십시오.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섭리의 가장 어두운 찡그림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지체 속에서 그를 의지하기를 배우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도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는 영혼에게 선하십니다.

 

II. 여기서 연약한 신자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길의 나무그늘에서 멈췄습니다. 그러나 구주께서 오셨다는 말이 곧 마르다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녀는 즉시 만나려고 급히 달렸습니다. 아, 어떤 사랑과 동정이 그의 눈에 나타났는지, 그의 이마에 어떤 거룩한 평온함이 나타나며 그의 입술에 어떤 부드러움이 나타났는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샤론의 장미요 골짜기의 백합화였습니다. 마르다는 그 모습을 보고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다음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녀의 억측: “만일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어떻게 그녀가 이것을 알았을까요? 그녀의 이러한 기대가 성경의 어떤 약속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양식과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리라고,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친히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여 주셨지만, 그들이 죽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은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욥도 “자기가 항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2. 그녀의 그리스도를 제한함. “만일 당신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왜 그래야 합니까?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며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내 팔이 짧아졌느냐? 내가 구속할 힘이 없느냐?” 그녀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잊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녀는 가버나움에 있었던 신하의 아들을 잊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요4:46) 그녀의 탄식과 번민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의 역사와 능력을 조용히 묵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3. 그녀의 불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22절) 이것은 믿음이었습니다만 또한 불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것은 믿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언자와 중보자로서 그를 믿었지만, 만물이 그의 손에 주어졌다는 것과, 그가 만유의 주님이시라는 것과, 교회에 있어서 모든 일의 머리가 되시는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탄식과 혼란과 어둠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가리게 했습니다.

 

4.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 왔습니다. 탄식했지만 그녀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리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모든 슬픔, 자기의 어둠, 자기의 불평을 그의 가슴에 쏟아냈습니다. 이것이 약한 신자의 모습이니 본성은 많고 믿음은 적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의심은 많아 자신의 불평만을 그에게 가지고 갑니다. 마르다가 자기의 비탄을 말한 것은 유대인들에게가 아니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아니며 오직 그에게 뿐입니다.

고난을 받는 때는 시험하는 때인 것을 아십시오. 고난은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것은 금만 아니라 찌꺼기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베다니에서 부드럽게 진행되었더라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들의 죄와 연약함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용광로는 찌꺼기를 드러내었습니다.

불신앙을 경계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억측을 경계하십시오. 성경말씀을 자신을 위한 약속으로 만들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말에 기대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그리스도께 당신의 길을 정해 드리는 것과 그의 다루심에서 그를 제한하는 일을 경계하십시오. 하나님의 증거의 일부분만 믿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오, 미련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당신의 불평을 그리스도께 가져가시도록 당신의 어둠이 어떠한지 생각하십시오.

 

III. 예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23-26절). 그리스도의 얼굴의 어떤 모습도 마르다의 열정적인 외침에 의해 일그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않으셨고 돌아서지도 않으셨고 전에 하셨던 것보다 자신을 더욱 드러내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다시 살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그녀를 위로하시며 자신 안에 있는 위로의 모든 샘과 근원을 보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를 보이셨습니다.

 

1. “나는 부활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리스도는 여기서 자신이 모든 죽은 신자들의 머리이신 것을 나타내십니다. (1).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보이십니다. 나는 모든 부활의 주체이며 샘이다. 부활의 샘이 내 손에 있다. 모든 성도들의 잠자는 티끌을 불러내는 것은 내 목소리이다. 그들의 티끌을 모아서 내 영광스러운 몸처럼 꾸미는 것은 내 손이다. 이 모든 것이 내 일이다. 내 명령에 따라서 에녹이 옮겨졌다. 나는 또한 엘리야를 데려갔다. 나는 또한 수많은 잠자는 신자들을 살리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종종 네 지붕과 무화과 아래서 앉았던 그가, 네 식탁에 앉았던 그가, 바로 그가 부활인 것을 너는 믿느냐? (2) 그는 모든 죽은 신자들이 살게 되리라는 확실성을 보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만일 내가 부활이라면 정말로 내가 위하여 죽은 자들을 다시 일으키리라. 내가 그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마르다처럼 여러분 중에서 믿고 죽은 자들을 위해 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형제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저들의 흩어진 티끌을 모아 일으키는 큰 일은 예수님께 맡겨졌습니다. “그들이 내 것이 되리니 내가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보물)를 삼을 것이요.” 말3:17. 아, 예수님으로 인하여 무덤에서 살아나는 것이 어떠한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되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천사의 소리라면 우리는 잠잠히 있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분의 목소리가 부를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서 일어나겠습니까!

오, 내게 감미로운 생각이여!

내가 살아나리라

그리고 이 눈으로

나의 구주를 보게 되리라.

아, 무덤의 오랜 침묵을 깨뜨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스도가 없는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겠습니까!

 

2. “생명이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는 여기서 자신을 자신의 모든 살아있는 신자들의 머리로서 드러내셨습니다. (1) 그는 그녀의 눈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자주 주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4).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지라.” (요일1:2),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로 오지 아니하였다.” 내 손에 모든 자연적인, 영적인,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그 생명은 내게로부터 나온다. 나는 시작하고 나는 실행하고 나는 영생을 준다. (2) 그는 모든 믿는 신자들에게 복된 결말을 보입니다. “그들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생명은 몸의 죽음을 인하여 방해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신자의 영혼 속에 있는 생생한 불꽃을 끌 능력이 없습니다. 만일 내가 그 생명이라면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나의 모든 백성을 지킬 것이다. 그들이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에 마르다처럼 여러분 중에 죽음을 바라보며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아! 왕들의 공포요, 공포의 대왕인 죽음이 올 때 그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모습이겠습니까! 조용한 용모, 닫힌 입술, 흐릿한 눈, 차가운 손에 두려운 어떤 것이 있어서 더 이상 우리들의 좋아하는 활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온 몸에 냉기가 돌 것입니다. 아!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말합니다. 이때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답은 예수님께서 생명이십니다. 자기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의 원천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무덤에 대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

 

IV. 마르다의 고백

1. 그녀의 믿음이 흘러 날 때. 남풍이 향초의 밭에 조용히 불면 그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게 합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시며 바람을 불어넣으실 때 그것이 그녀에게서 이러한 감미로운 고백을 내게 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이 마음에서 어떻게 솟아오르는지 보여줍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우물을 파듯이 믿음을 찾고 있습니다.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서 믿음이 거기 있는가 하고 찾으려고 자기의 오염된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설교와 성찬시에 믿음이 거기에 있는가 하고 여러분의 감정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여전히 죄와 실망 밖에 찾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계획을 배우십시오. 그녀는 예수님의 얼굴을 완전히 들여다봅니다. 그녀는 그의 먼지 묻은 발, 더러워진 옷, 사람보다 더 부드러운 그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씀을 마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그녀가 본 모든 것이나, 그녀가 느낀 모든 것에 불구하고, 그녀는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신자들의 머리로서 살아있는 신자들의 머리로서 자신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행하신 발견이 마르다의 지친 영혼을 살려서 그녀는 말합니다. “예, 주여, 내가 믿나이다.” 믿음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서 옵니다.

 

2. 그녀의 믿음이 흘러간 곳: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아마도 주님 예수의 말씀에 함축된 모든 것을 이해하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그녀가 보았지만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한 가지, 곧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그녀의 신앙을 묶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영광스러운 약속이 열려지지 않은 때에, 그의 충분한 뜻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을 끌어안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많은 것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전체를 여러분의 믿음의 팔 안으로 끌어들이며 말하십시오. “예, 제가 믿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제가 믿습니다.”

 

 

 

베다니 가족 5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28-35).”

 

I. 마리아를 부르심.

1. 마르다가 메신저인 것을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의 감미로운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에서 위안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는 질문에 의해 힘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가슴에 넘쳐오르는 슬픔의 물결이 잠잠해졌습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그리스도로 통하여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메신저들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하나님이 자기의 일꾼들을 다양한 시련과 위로를 통과하게 하셔서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에 적합한 메신저들이 되게 하십니다. 아! 우리가 그 그늘에 앉았고 그 맛있는 열매를 먹었던 사과나무의 뛰어남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면! 마르다는 마리아와 비교할 때 연약한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기쁜 소식을 그녀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신자들 외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목사가 때로 자기가 위하여 사역하는 사람들보다 적은 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유명한 신자들이 낙심하고 당황할 때 자주 아주 작은 수단이 그들을 다시 끌어올리는데 사용됩니다.

 

2. 그녀는 마리아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지난번 주님께서 유대에 있었을 때, 그들이 돌을 던져 그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아마 마리아 곁에 앉아있던 유대인 중에 얼마는 그의 악랄한 대적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들어와서 마리아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그녀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그녀는 그의 안전과 그의 뜻에 치밀하게 힘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셨으니 그의 명예를 위해 여러분도 치밀하여야 하며 그의 이름과 대의를 위해 세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몸의 지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할 것입니다.

 

3. 메시지: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마리아는 베다니의 오두막에 슬퍼하고 낙심한 채 앉아있었습니다. 장례가 지난 지 나흘이 되었으나 아직 위로는 없었습니다. 나사로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가 없는 집은 황량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만 그의 말씀은 효력이 없었고 그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왜 그가 요단 강 건너에서 지체하고 계실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기를 잊으셨는가? 갑자기 그녀의 자매가 속삭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녀가 알아채기 전에 오두막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이신줄 알지 못했던 디베랴 호숫가의 그 아침도 그러했습니다. 아니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다가갔으나 그들의 눈이 닫혀져 그들이 그를 알지 못했던 그날 저녁도 그랬습니다. 그와 같이 죽음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찾아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그같이 예수님께서 자기의 울고 있는 황폐한 교회에 오실 것이고 이 부름이 죽은 자들을 깨울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II. 마리아의 일어남. (29-31)

1. 그녀는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두 자매 중에 마리아가 더 깊이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마리아는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집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르다보다 그리스도의 부재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그의 말씀을 더욱 믿었고 그 말씀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거의 부서졌습니다. 아! 본성적인 것과 영적인 근심이 합쳐질 때 그것은 깊은 근심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얼굴의 웃음을 가질 때 고난은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왜 그 슬퍼하는 여인은 일어나서 얼른 눈물을 훔치고 빠른 걸음으로 오두막 문을 나섰을까요? 그녀 주변에 둘러앉았던 친구들을 그녀는 아주 잊은 듯 싶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이제도 슬퍼하는 자들에게 주 예수님의 임재가 그와 같습니다. 세상의 위로자들은 모두 도움이 안 되는 의사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헛된 위로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약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잠14:10).”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부르시면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의 부르심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평안을 말합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슬퍼하는 자들은 빨리 일어나서 그리스도께 가야 합니다. 상을 당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슬픔을 그리스도의 발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2. 장소: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30절) 예수께서 그날 아마 멀리서, 여리고에서 먼 길을 오셨을 것입니다. 그는 걸어서 줄곧 여행을 하셨고 감람산 아래까지 오셔서 베다니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나무사이에 멈추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마치기까지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그는 야곱의 우물에 앉아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을 때처럼 주리고 목마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였으니 죽은 나사로를 살리며 자신의 아버지의 크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과 자기 사람들을 위해 선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즐거움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을 잊게 했습니다. 아, 우리가 찾아가야 할 대제사장은 얼마나 준비된 분인가를 아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곧 육체적인 위안을 많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자기의 육체적 휴식과 건강보다 자기의 봉사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많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3.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따라갑니다. 유대인들이 베다니에 오게 된 것이 본성적인 친절함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본성적인 친절함이 마리아를 따라가게 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의 영적인 탄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가 무덤에 울기 위해서 가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한 지점으로 인도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니.”(45절)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어떤 영혼은 삭개오 같이 호기심에 이끌려 특별한 목사에게 가서 말씀을 듣고 능력이 입혀져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이는 친구에 대한 호의로 갔다가 잡혀서 상한 마음으로 집에 갑니다. 그의 이름이 놀라움(Wonderful)입니다. 그의 방식이 놀랍고 그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경건한 사람에게 가까이 달라붙어서 그와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III. 예수와의 만남 (32-25절)

1. 마리아의 세심한 겸손. 빠른 걸음으로 마리아는 돌길을 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만났던 같은 장소에 서 계셨습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는 자신의 동정어린 눈을 그녀에게 향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를 보고 그의 발에 엎드렸습니다. 그 순간에 그녀의 가슴에 어떤 가득한 감정이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왜 그가 빨리 오시지 않았는지 의심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어두운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녀는 그가 자기의 구주라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발에 엎드렸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못된 죄인이며 밟힐만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벌레인 것과 자기의 모든 소망은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형제들이여, 마리아의 자리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감미로운 일입니다. 가장 유명한 신자들은 가장 낮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나는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못한 자다.” 빛 가운데로 가까이 갈수록 결점들은 더욱 어둡게 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까이 살수록 자신의 완전한 악함을 더욱 보게 될 것입니다.

2. 마리아는 마르다의 고백을 반복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 이것으로 보아 두 자매가 서로 그리스도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셨더라면 자기들의 형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그것은 억측과 불신앙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것을 마르다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불신앙을 배우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히3:13).” 그러나 신자들은 자주 서로를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동정. (1) “예수께서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이것은 겸손입니다. 그의 눈이 자신이 아주 사랑하는 자, 그렇게 훌륭한 신자, 그가 씻어서 의롭게 한 사람인 그녀의 울음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이 동정했습니다. 그는 좀 더 세속적인 친구들인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안에서 탄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까이 오셔서 그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가 나인성의 과부를 보았을 때 그녀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가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동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완전한 사람되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2) “가라사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이것 또한 인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를 어디다 매장했는지 잘 아셨지만 그들이 자신을 무덤으로 인도하기를 바라십니다. (3)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가 무덤과 돌과 우는 유대인들을 보셨을 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깊이 동정했기 때문에 그는 우셨습니다. 그는 죽음에서 그를 살리시리라는 것을 아셨지만 다른 사람들이 울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그는 우리로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본을 보여 우셨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이기 위해 우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베다니 가족 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1:35-42).”

 

지난번에 우리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이 놀라운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 그를 어디에 두었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와서 보옵소서.” 그들이 예수님을 바위로 된 굴로 모시고 갈 때에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고, 행복에 있어 무한한 분이시지만 그는 우셨으니 자기 사람들의 괴로움을 그렇게 참되게 느끼신 것입니다.

 

I. 이 장면에서의 유대인의 느낌.

1. 그들이 그의 사랑에 놀랐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이 유대인들은 아주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와 같은 사람의 넘침에 놀랐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인물이 나사로의 무덤에 굽혀 살피는 것을 보았고 그의 괴로운 탄식을 들었고 그의 동정어린 눈으로부터 비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솔기 없는 통으로 짠 옷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 그들은 속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약간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의 영원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나사로를 위해 죽도록 한 것이 사랑이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사랑의 충만함, 아낌없음, 거대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세속적인 사람들까지 놀라게 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자기 사람에게 평안을 주실 때, 고난의 파도가 그 영혼에 몰려오고 구름과 어둠과 가난과 곤란이 그의 거처에 넘치지만 그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세상은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예수님께서 죽어 가는 신자와 함께 계시고 그의 곁에 서 계셔서 자기 날개로 그를 감싸주시고 피로 그를 씻어 주시고 거룩한 평안으로 그를 채워주심으로 그가 흔들리지 않고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할 때 그때 세상은 외칠 것입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나로 의인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나의 종말이 저와 같게 하소서!”

또 다른 엄숙한 날이 다가 오고 있으니, 여러분 중에서 신자들 모두가 헤어져서 그 보좌 오른 편에 서게 되고 비록 비천하고 지옥에 들어갈 만한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환영하여 자신의 보좌에 앉게 하여주시고 자신의 영광을 나눠주실 것입니다. 그때 불신자들인 여러분들은 슬피 울면서 외칠 것입니다. “보라, 그가 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2. 어떤 이들은 그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 예수께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주신 일이 바로 얼마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둘러 서 있는 유대인들은 그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그와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만일 그가 진실로 나사로를 사랑했다면 그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을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라면 죽지 않게도 할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그의 눈물을 의심했고 그의 말을 의심했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자체의 주장으로 주 예수님의 아주 분명한 선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었다고 듣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그가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을 바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여러분의 보잘것없는 주장으로 그의 눈물을 업신여겨 버립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단순한 선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이렇게 바꿉니다. 만일 주께서 나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셨다면 그가 지금 이전에 나를 자기에게로 데려가야 하지 않았을까?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타내심을 쑥과 쓸개즙으로 바꿔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 많이 볼수록 더 굳어집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이 들을수록 더 강퍅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II. 무덤의 장면

1. 명령: “돌을 옮겨 놓으라.” 그리스도의 방식은 여러분의 방식이 아니고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자신의 말씀으로 그 돌을 물러나도록 명령하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친히 일어나실 때, “그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마르다의 불신앙을 드러내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있는 불신앙은 상처 속에 있는 나쁜 기질입니다. 그것은 곪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르다의 가슴에서 그것을 도려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수단을 사용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무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었으나 그들은 돌을 굴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깨우는데 신적인 권능을 사용하려고 하셨지만 그는 돌을 옮기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가 회심하지 않은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불러내실 수 있는 분이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돌을 옮길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수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를 복음의 진실한 설교를 듣도록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말하십시오. 그에게 편지를 쓰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라.”

 

2. 마르다의 불신: “주여 죽은지가 나흘에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리아는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하시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모든 일을 잘 하시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사랑과 지혜와 은혜로 충만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소리쳤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잊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잊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그녀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그의 감미로운 말씀을 잊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기의 고백도 잊었습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의 은혜를 어떻게 방해하고 있었는지 보십시오. 그녀는 자기의 동생을 깊이 사랑했습니다만 그녀는 돌이 무덤 문에 그대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빛 가운데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쉽게 불신에 빠지는지 아십시오. 몇 분전에 마르다는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가라앉습니다. 오,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거대한 암흑과 죄가 있습니까!

불신이 여러분에게서 어떻게 여러분의 은혜를 몰아내는지 아십시오. “저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마르다는 나사로의 회복을 거의 훼방할 뻔하였습니다. 아, 예수님의 말씀도, 그의 사랑과 권능의 이적도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3. 그리스도의 책망: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그리스도께서 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마치 마리아야, 내 말을 잊었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고 이제 자기의 말씀을 기억시키십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거짓말쟁이냐? 속이는 시내 같으냐? 내가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후회하는 사람의 아들과 같으냐? 불신앙이 예수님을 어떻게 상하게 했는가를 보십시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믿지 아니하는) 여러분은 이방인들보다 더 깊은 지옥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버림을 받게 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와 불신앙으로 버림을 받게 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III. 그리스도의 기도와 감사.

1. 그의 기도는 비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기도한 기도내용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탄식과 눈물 가운데 그는 자신의 아버지께 은밀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홀로 저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단순히 감정의 눈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심어린 기도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겉치레 동료의식이 아니고 참된 중보기도 입니다. 그리스도는 갑작스러운 시련 속에서 여러분이 기도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은밀한 장소를 얻지 못할지라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에게 마음을 들어 올리십시오. 아, 형제들이여! 진실한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기도하는 장소로 인해 당황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식이면 기도하기에 은밀한 장소를 만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걸으면서, 일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기도시간이 온종일이 되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됩니다. 사탄이 여러분 오른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지내십시오. 매일 하나님과 홀로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갑작스러운 시험과 고난의 때에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여러분의 아버지의 귀에 여러분의 마음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2. 감사: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함이니이다.” (1)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기도에 얼마나 빨리 임하시는지 아십시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내가 아나이다.” 그리스도께 하시는 모든 간구는 응답됩니다. 그가 구하는 순간 응답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우리는 그가 구한 것을 가진다는 것을 압니다. (2) 그는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그는 우리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리십니다. (3) 그가 이렇게 큰 소리로 하시는 것은 둘러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영혼의 회심을 구하셨으니 여기서도 자신의 아버지께 기도와 감사를 드림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는 그를 둘러선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분으로 세상의 구주로 그를 믿게 하시려고 큰 소리로 기도하십니다. 정말로,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이 그를 믿게 하려고 그러한 일을 여기에 기록하셨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복음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동정 많으신 구주로, 중보자와 간구자로 여러분이 그를 믿도록 복음에 여러분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다니 가족 7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요한복음 11:43-46).”

 

I.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1. 시간: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처음 들으셨을 때, 그는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머무셨습니다. 천천히 조용히 그는 베다니로 이동하셔서 그가 그 무화과나무 사이에 도착하였을 때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나사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 되었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시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불신앙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자신의 세밀하고 동정어린 마음을 나타내실 때까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아버지께 공적인 감사를 드릴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의 때는 맞는 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사로처럼 이스라엘은 1800년간 무덤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들의 뼈는 말랐고 아주 많았습니다. 그가 저들을 치시는 말씀을 하신 후에 그는 진심으로 그들을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가 그들에게 생명의 영을 부으시고 그들이 나오도록 하시고 죽은 세계에 생명이 있게 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그 자신의 때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들의 불신앙을 들어내시고 자신의 부드러운 마음을 나타내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때 자신의 때가 왔을 때 그는 외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나오라. 아마도 스코틀랜드 교회의 해방에서도 그러하실 것이고, 개개인의 신자들을 구원에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2. 사역: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이곳에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일어났습니까! 그곳은 베다니가 있는 좁은 골짜기의 외진 곳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새로이 열린 무덤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이었고 문에 굴려 막았던 큰돌이 이제 옮겨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하시려는 일을 궁금해 하면서 주변에 서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강퍅한 농부들이 새로 옮긴 돌에 기대어 깜깜한 동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켰고 깊은 적막함이 그 무리에게 걸쳐 있었습니다. 굴 입구를 향하여 구주께서 서셨습니다. 그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그의 눈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하여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좁다란 동굴이 엄숙한 소리로 울립니다. 나사로의 귀는 죽었고 차가웠으며 손발은 뻣뻣하여 움직이지 않았고 눈꺼풀은 굳게 닫혔고 죽음의 냉기가 그의 이마에 있었고 수의는 몸에 둘렸고 얼굴은 수건으로 묶여있었는데 “나사로야 나오라”는 갑작스러운 외침에 죽은 자가 깨어났습니다. 그 소리가 깊은 동굴을 뚫고 들어가 축축한 수건을 지나 죽은 귀에 들어갑니다. 심장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고 생명의 온기가 죽은 사람의 핏줄을 통하여 흐르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열과 듣는 감각이 되돌아 왔습니다. 그것은 잘 아는 목소리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다. 그가 나를 부르시네.” 그가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얼마나 단순하고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시29:4,5)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생명으로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1. 부활로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님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방식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이것은 매우 가까이 있는 날이니 그때에 모든 죽은 귀가 똑 같은 목소리로 ‘나오라, 나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신자들을 인하여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기를 배우십시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나사로의 티끌은 예수님께 귀했습니다. 그는 돌무덤에 그것을 남겨두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같이 그의 눈에 모든 나사로들의 티끌이 그러합니다. 그는 그들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녹색의 잔디 밑에 있든지, 깊고 푸른 바다 속에 있든지, 아니면 멀리 떨어진 전장에 있든지, 불과 연기 속에서 탔든지 문제가 안됩니다. 주 예수님께서 저들의 흩어진 티끌들을 모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그들을 만드실 것입니다.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배우십시오. 무덤에 대한 것만큼 우리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없습니다. 아! 살아있는 사람들을 떠나서 우리의 옷으로는 수의, 우리의 침상으로는 관, 우리의 친구로는 벌레를 가진 채 그 비좁은 집에 눕게 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비천하게 되는 것이고 혐오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1-55) 여러분의 눈을 나사로의 무덤에 계셨던 예수님께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그가 서서 잠자는 세상의 무덤을 향하여 외치실 것입니다. “나오라.”

오, 그리스도 없는 사람이여! 당신도 그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지옥에서 그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죽음과 지옥이 자기들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당신이 그것을 들어야만 합니다. 당신이 나사로처럼 나오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무덤에서 계속 누워있고 싶을 것입니다. 아, 바위야 내게 무너지고 산들아 나를 덮어다오. 아마 당신은 무덤의 양쪽에 매달리고 싶어하며 당신의 약한 관을 팔로 끌어안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의 영혼은 지옥에 계속 누워 있고 싶을 것입니다. 오! 저를 내버려두십시오. 불의 파도가 저를 덮어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벌레들이 씹어 먹지 못하고 영원히 죽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러나 당신은 심판의 부활을 받으려고 불려나와야 합니다. 당신이 수치와 영원한 멸시를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2. 생명으로. 이것이 죽은 영혼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여러분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은 나사로의 몸이 보통 사물에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일에 죽어 있습니다. 모든 회심하지 않은 가슴에 완전한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술의 단순한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상적인 죽음이 아니고 진짜 나사로의 죽음처럼 진짜 죽음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하나님의 일들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귀가 그러한 것들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들을 느끼지 못합니다. 죽은 영혼을 일깨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목소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목사들을 통하여, 섭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의 목소리가 죽은 자에게 미칠 수 있습니다.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경고와 부르심과 초청을 내는 것이 목사들과 경건한 친구들에게 정당하다는 것을 배우십시오. 우리가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믿으면서 그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부르고 그들을 초대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행하신 바로 그 방식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죽은 영혼들에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경고와 부름과 초청으로 하십니다. 이 곳에 있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죽었을 때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경건한 사람들은 여러분의 친구들이 나사로와 같이 죽은 것 같이 나타날지라도 이러한 부름과 경고들을 고안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을 찾아야 할 곳을 배웁시다. 그것은 마리아의 소리도, 마르다의 소리도, 유대인들의 소리도 아니고,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소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돌을 옮길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목소리, 살아 있는 모든 자의 생명이신 그분의 목소리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여전히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깨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목소리뿐입니다. 제 목소리도 아니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마리아들과 마르다들의 목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계속 자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죄악 중에 죽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곳에 여러분은 결코 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번 목사들의 목소리가 이 집을 지나며 울렸고 여러분의 귀를 지나며 울렸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죄악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말씀을 통하여 말하실 때 그때는 여러분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쫓게 될 것입니다.

 

II. 구경꾼들에게 끼친 영향.

1.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습니다. 베다니의 복된 날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황혼을 아침으로 바꾸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들의 깊은 슬픔을 찬양의 노래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죽었던 형제는 자기들의 품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날 저녁 가정예배에서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쁨은 이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불신앙이 이제 깨끗하게 씻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름없는 아침과 같았습니다. 그의 지체, 그의 약속, 그들에 대한 그의 시험은 모두 이제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마리아가 그의 발 앞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들을 때 그녀는 그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기쁨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저를 믿었더라.” 그것은 영원을 위한 출생의 밤이었습니다. 목자께서 그 밤에 잃은 양들 얼마를 찾으셨습니다. 나사로를 불러내신 그 목소리는 많은 마음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베다니의 오두막집은 그날 밤에 작은 천국과 같았습니다. 그들로 믿게 한 것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것은 한 가지 일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을 본 것입니다. 마치 죽어가는 강도가 한 가지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보고서 믿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그의 거룩한 인품과 그의 평온함, 그의 사랑, 그의 경건을 보았을 때 그는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이시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유대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큰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두 가지를 보았으니 하나님의 권능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도 죄인들로 그를 믿도록 설득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구원하시려고 하는 그의 사랑과 구원하시기에 능하신 권능을 보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많은 이들이 그를 믿는다면, 만일 여러분이 오늘 그를 여러분이 보증인으로, 맏형으로, 친구로 붙잡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하겠습니까!

 

2. “어떤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고하매.” 어떤 이들은 구원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굳어졌습니다. (1) 자기들의 친구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자기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회심에 대해 외인들로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취하여졌고 어떤 사람은 남겨졌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죄인들이 이곳에서 깨우침을 받고 구원을 받을 때 저들의 이웃들도 또한 구원을 받게 되겠구나하고 저는 종종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정반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옆에서 구원을 받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2) 그들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였으나 구원을 받지 못했고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무척 사랑한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우리의 마르다들과 마리아들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곧 여러분에게서 영원토록 헤어지게 될 것입니다. (2) 그들의 반문은 해결되었습니다만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37절). 그들은 그의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고, 또는 그가 나사로를 무덤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었으리라고 반박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반문이 해결이 났습니다. 나사로가 일어났고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들에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이 닫혔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아, 여전히 똑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아주신다는 것을 안다면 내가 가리라. 내가 옷이 있으면 내가 가족의 걱정에서 벗어나면 내가 내 영혼을 돌보기 시작하리라.” 문제가 해결되지만 여전히 그들은 언제나 관심이 없습니다. (4) 그들은 그리스도를 볼수록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악랄한 대적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가서 그를 죽일 계획을 꾸몄습니다. 아! 이것은 정말 믿지 못할 일입니다. 본성적인 마음은 어떤 악마 같은 마음인지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기를 거절할 뿐 아니라 그의 이름과 뜻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롬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