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러브(Christopher Love, 1618-1651.8.22)

러브 목사님은 그 자신의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목사, 사랑스러운 순교자입니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가졌고(초상화는 없지만 옥중서신들을 통해서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가졌고(유명한 청교도들인 토머스 왓슨, 젠킨, 로빈슨, 케이스등이 있고 그의 순교 후 위협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장례식 설교를 했던 토머스 맨튼 등) 생전 목사로서 전한 설교들이 사랑스럽고, 순교를 앞두고 옥중에서 오간 서신들과 단두대에서의 증언이 사랑스럽습니다.

미국 Soli Deo Gloria 출판의 돈 키슬러는 러브 목사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아내와 주고 받은 옥중서신들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의 거의 모든 설교들을 모아 편집하여 출판하고 전기까지 저술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러브의 책을 소장하고 사랑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그의 설교는 청교도들의 깊은 학식과 경건을 맛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의 설교 “은혜”는 여러 번 영어로 출판되었고 그가 순교 당한 해에 교우들에게 전한 15편의 설교로서 다양한 수준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들 중 세 편을 싣습니다.

설교 “은혜”의 텍스트는 돈 키슬러가 편집한 “Grace” (SDG)가 있지만 편집상의 오류와 오자들이 발견되고, 1807년 Glasgow 편집본, 무엇보다 역자 소유의 1653년 판 “Works of Christopher Love”를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옥중서신들은 주로 1807년 Glasgow 판, 1807년 Bungay 판을 사용했고 돈 키슬러 편집본을 참고했습니다.

 

타워힐의 단두대에서의 러브의 마지막 연설(일부)

1651년 8월 22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저는 오늘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탄식거리, 악인들에게는 조롱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 두려움이 아닌 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죽음 사이에 약간 남았지만 저와 천국 사이에 약간만 남아있다는 것이 저의 마음으로 감당하게 합니다. 순교자 테일러 박사가 처형대로 가면서 자기와 자기의 아버지 집 사이에 두 스타일만 남았다는 것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와 저의 아버지 집 사이에는 더 짧은 길이니 저와 영광 사이에는 두 걸음뿐이고 제가 그 단두대에 눕기만 하면 저는 보좌 위로 오를 것입니다. 저는 오늘 거친 항로를 통과하여 영원의 바다로 항해하여 제 안식의 천국으로, 홍해를 건너 약속된 땅으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느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게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같이 저에게 너는 타워힐에 올라가서 거기서 죽으라. 이삭은 자기가 늙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젊었지만 제가 죽는 날을 알고 어떻게 죽는지를 알고 또 죽을 장소도 압니다. 저는 유명한 복음의 두 설교자들이 앞서 죽임을 당했던 방식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니 세례 요한과 사도 바울, 그들이 모두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한 사람은 성경의 진술에서 다른 사람은 교회의 역사에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목베임을 당했다고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가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처한 불리한 입장이 있습니다. 그들이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혹은 양심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문제에 간섭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마귀의 오랜 술수이니 실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의 원인이 그들의 신앙이요 양심일 때 그것을 국가에 대한 음모로 탓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정치적인 이유로 죽이려고 했지만 실상은 그들의 통치자들로 그에게 노하게 만든 것은 그의 예언의 진실성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은 그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그가 갈대아사람들에게 엎어져서 해외병력을 끌어들여 자기들을 침략하려고 획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문제로 제가 고소를 당했으니 그것에 대해 저는 예레미야처럼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정말로 저는 성경에서 성도들의 고난의 이유가 여전히 정치문제에 대한 그들의 간섭으로 탓을 돌리고 있는 다른 예들을 발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설교했던 바울은 꾀는 주동자라는 구실 아래 만일 사람들의 뜻대로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었습니다. 사회적인 이유로 제 생명이 빼앗길 참이니 실상은 제가 저의 언약을 추구하고 저의 원리들과 양심을 사람들의 야망과 정욕에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저는 오늘 이중 교환을 합니다. 저는 설교단을 단두대로 바꾸고 단두대를 보좌로 바꾸며 세 번째 교환을 더할 수 있다면 저는 이 무수한 군중, 타워힐 앞의 이 무수한 군중들의 무리를 천국에 거룩한 시온 산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의 무수한 무리와 바꿉니다. 저는 보초병들을 저를 받아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갈 천사들의 경호와 바꿉니다. 이 단두대는 제가 설교했었던 설교단들 중에 최고이니 그 설교단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하셨지만 이 설교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서 전하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설교단에서 많은 설교들에 의해서 했던 것보다 단두대에서의 이 한 연설에 의해서 하나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후 그는 말했습니다. “제 피가 귀족의 피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피요, 목사의 피입니다. 더욱 그것은 무죄한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의 풍성함을 찬양합니다. 저는 외진 시골 웨일즈에서 평범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명예로운 고난을 위하여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저의 생애의 첫 14년 동안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15세 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회심시켜 주셨습니다. 저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충성되게 여기셔서 목사로 세우시고 저의 영광인 목회사역에 종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저는 보좌에 앉은 왕이 되는 것보다 강단에 있는 설교자가 되고 싶었고 온 나라들에게서 조공을 받는 것보다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종의 영 아래 있었고 전에 때로 이빨을 뽑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었는데 지금 목이 잘리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가깝지 않을 때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지만 죽음이 가까운 지금 제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제 위로는 여기에 있으니 사람들이 저를 죽이겠지만 그들이 저를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들이 저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지만 그들이 저를 천국 밖으로 몰아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의 피를 흘릴 때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완전한 선언을 기대합니다. 저는 저의 먼 집으로 가며 여러분은 가까운 집들로 갑니다만 여러분들이 각자의 집에 도달하기 전에 저는 저의 집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자신이 가지지 않았던 힘을 가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드레이크 박사가 러브 목사에게

1651년 7월 12일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보배로운 친구여, 하나님께서 저에게 당신을 알게 하신 복된 그 첫날부터 당신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이유를 가졌었는데 당신이 승리의 수레를 타고 올라가서 구름 같은 증인들의 반열에 이르러 남아있는 우리를 인도하고 격려하며 우리 앞에 놓은 경주를 힘써 달려가도록 하는 이때보다 더한 적은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목사님, 저는 당신께서 당신의 여정 끝 가까이 계시면서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크신 선장이 항해하셔서 위험한 시련의 바다에서 나와 항구로 들어가서 당신의 순례의 누더기들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예루살렘의 자유로운 시민처럼 흰옷으로 입히시려고 하는 것을 저는 땅의 오순절과 희년을 꿈꾸며 오해했습니다. 그 50일째 날은 이제 생각하니 위에 있는 영원한 희년으로 당신을 부르는 암시와 소환령이었고(히12:22,24) 영원한 안식의 전조였습니다(히4:9,10). 자기들이 우리에게 가장 심한 해를 입혔다고 생각할 때만큼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대적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게 보이겠습니까! 저는 이제 로마서 8장 28절, 33절에서 끝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3장 21절 사도의 에피니키온(승리의 노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헤어지게 하기는커녕 즉시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며 한번 내리침에 의해서 아주 명예롭게 아주 쉽게 아주 평안하게 아주 빠르게 당신은 눈 깜박거릴 사이에 천국에 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안락의 칙서를 주시며 당신에게 제 육시에 당신의 임금을 지불하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오직 정직하고 명예로운 사역을 맡기시고 우리의 과업을 쉽고 짧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마치 우리가 우리의 삯을 벌어들인 것처럼 넉넉하고 풍족하게 보상해 주시는 우리의 좋은 상전을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 찬송할 뿐입니다. 세상의 총신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품꾼이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눅15:17,19).

목사님, 저는 당신의 충성스러움, 인내, 용기, 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당신은 당신의 대적들의 음모와 힘을 시험하여 드러냈고 당신의 비천한 동료 수난자들에게 은혜로 인하여 그들이 정복될 수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2,14,16). 주께서 당신을 진짜 삼손을 만드셔서 당신이 평생 했던 것보다 당신의 죽음으로 마귀의 나라에 더 해를 끼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오직 그의 옛 방식을 쓰고 계시니 순교자들의 피를 자기 교회의 씨로 삼으십니다(골1:24). 히엘은 여리고를 세움으로 인하여 마땅히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을 세우심을 인하여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가 그 기초를 그의 장자 아비람으로 놓았지만 그것의 문들은 작은 아들 세굽이 설치했던 것입니다(왕상 16장 마지막). 그같이 우리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인생들이 하나님께 높임을 받고 힘을 얻어 그의 이름(행5:41, 빌1:29), 대의, 교회와 언약을 위하여 일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을 그같이 복된 세굽을 만드셔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수치, 약함, 위험으로 판단하는 그것을 당신의 명예, 힘, 안전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명예롭게 하셔서 엘리야가 되게 하시고 먼저 불수레에 오르게 하시니 저는 거짓없이 엘리사가 되어 당신에게 두 세 가지 대담한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당신의 영의 갑절의 분량을 제게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둘째, 가능하다면 창살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혼인날 아침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셋째, 당신의 옷자락을 떨어뜨려 주셔서 제가 그것으로 요단 강, 아니 만일 하나님이 저에게 요구하신다면 홍해를 가르고 그 강한 물살에서 애굽사람처럼 가라앉지 않게 해 주십시오. 시32:6. 넷째, 만일 하늘에서 여기 아래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눅16:24,25,28) 당신이 복된 천국에 있을 때 뒤에 남아 있어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오신 것처럼 자기들에게 오실 때까지 폭풍 가운에 애쓰는 당신의 불쌍한 친구와 나머지 당신의 동료 군사들을 생각해 주시겠지요. 진실로 승리한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를 잊지 아니하니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해질 때까지 천국에서 모순이 아닐 것입니다(계6:9,10). 만일 공의가 그들로 적들로 대항하여 기도하게 한다면 어찌하여 사랑이 자기들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실로 승리한 교회와 전투하는 교회 사이에 성도들의 교통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이 죽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나 하늘에서 자기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바랐고 저는 거기서 그들이 미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제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저는 알고 있고 사랑은 곧 자만의 허풍을 터뜨릴 것으로 높아지지 않는 것을 확신합니다. 자기들의 보기에 가장 낮아진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제 감정이 수확기의 요단강과 같지만 당신의 시간이 짧은 것을 알고 당신을 여정에서 빗나가거나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제가 저의 말에 경계와 둑을 쌓아야겠습니다.

당신께서 요단강을 건너 불병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요단강은 회개하는 눈물의 강이 죄의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는 것만큼 나아만의 문둥병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 효과적이었으니 그리스도의 피의 거대한 강을 뒤따르는 것입니다(시119:136).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아바나나 바르발이 아니고 요단강물이니 모든 눈물이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눈물이 씻는 것입니다. 당신은 슬퍼하실 시간을 별로 가질 수 없을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수건과 손수건을 가지고 서 계십니다(시56:8, 계7장 마지막 부분, 21장 4절 이사야 25:8). 영적인 기쁨과 근심은 이생에서 뗄 수 없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비둘기 같은 위로의 영이 이 시내를 좋아합니다(아3:12. 마3:16). 각 참된 기독교인은 불의 세례와 결합된 강의 세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특별히 추가한 피의 세례로 명예롭게 하십니다. 눈물의 잔과 위로의 잔이 함께 가는 것이 좋고 자기의 마실 것에 울음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시102편 9절).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피의 잔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로 보증하려고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 두 야심 많은 형제들의 의미로서가 아니지만 그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마22:22,23). 만일 우리가 천국에서 울거나 회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땅에서 더 많이 더 낫게 울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던 것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우리 모두에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하게 하십니다. 만일 제가 더 당신을 뵙지 못해도 저는 여기서 저의 긴 작별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말하느냐고요? 그것이 짧은 작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몇 주, 아니 몇 날이 저로 그리스도의 팔에 안겨 있는 당신의 복된 모습을 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천국에서 성도의 교제는 그들의 본질적인 행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로 당신의 은혜들을 닮게 하시고 그때 오직 최상의 행복 지고의 선이신 오직 하나님이신 당신의 행복을 상속받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위험보다 더 가까이 당신에게 계시고 가장 필요한 시간에 당신을 붙들어 주시고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악한 짓을 할 때 당신의 영혼을 자신의 자비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행7:55, 56, 59. 눅2:29,30. 딤후4:4,7,8. 그같이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환난에 있어서 당신의 비천하고 합당하지 못한 친구요 동료.

 

러브 부인이 자기의 남편에게

1651년 7월 14일

사랑하는 당신께

제가 한 마디 더 쓰기 전에 당신께 부탁드리오니 지금 당신의 아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께서 거리낌없이 예레미야 49장 11절에서 “네 고아들을 남겨 두라. 내가 그들을 살려 두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맡기셨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지으신 이가 저의 남편이 될 것이며 당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피붙이들을 위하여 당신이 하나라도 괴로운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거리낌없이 당신을 당신의 아버지의 손에 넘겨드리고 당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영광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떠나는 남편을 제가 가진 것이 제게 명예로운 일로 여기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손실에 대해 당신께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고 제 마음 속으로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의 이루 형용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유익만을 온전히 굳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영원토록 영광의 주님께 혼인하려고 단지 죄 많고 죽을 아내를 떠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단지 당신의 맏형 주 예수님께 가려고 자식들, 형제들, 자매들을 떠나시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단지 성도들, 천사들, 영광 중에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즐기러 가시려고 땅위의 친구들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만 천국을 위하여 땅을 떠나시며 감옥을 궁전과 바꾸시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만일 본성적인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당신 안에 있는 은혜의 영이 여기 아래에 있는 것은 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비할 때 단지 분토와 찌끼라는 것을 알아 그것들을 가라앉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이 영광의 소망에 당신의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땅의 손실을 당신의 발로 밟게 되실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이여,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영광을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위하여 당신을 예비하신 것을 알고 있으며 제가 확신하는 것은 그분께서 그곳을 즐기기 위해 당신이 가는 길을 달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날 아침 당신의 옷을 입으실 때 아, “나는 지금 나의 구속주께 영원토록 혼인하려고 혼인예복을 입는 중이야”라고 생각하시어요.

죽음의 사신이 당신에게 이르렀을 때 그가 당신에게 두려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마시고 그를 영원한 생명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신처럼 그를 바라보세요. 당신이 단두대를 오를 때에 (당신이 제게 말한 것처럼) 그것은 단지 당신을 당신의 아버지 집으로 실어가는 당신의 불수레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의 내리침을 받으려고 당신의 보배로운 머리를 내려놓으실 때 당신이 제게 말한 것을 기억하시어요. 당신의 머리는 당신의 몸에서 떨어지겠지만 순식간에 당신의 영혼은 하늘에 계신 당신의 머리 주 예수님께 연합될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좀 일찍 헤어지는 것이 쓴 것처럼 보여도 우리 함께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결정이며 의지라고 생각하시어요.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천국에서 다시 함께 즐기게 될 것이예요.

이 말씀들로 서로 우리 위안을 삼아요. 내 사랑하는 연인이여, 평안한 마음을 가지셔요. 단지 잠깐의 침이 있고 당신은 곤한 자가 안식하며 악한 자들이 괴롭힐 수 없는 곳에 계시게 될 거예요. 당신이 쓴 나물로 점심을 드시겠지만 그날 저녁 그리스도와 함께 감미로운 만찬을 드실 거예요. 사랑하는 이여, 제가 당신에게 쓴 것은 이것으로 당신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아니어요. 왜냐하면 이러한 위로들을 저는 당신을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예요. 저는 그만 쓰고 당신을 더 이상 괴롭혀 드리지 않고 다만 당신과 제가 함께 있게 될 하나님의 품에 당신을 맡깁니다.

잘 가세요. 나의 사랑이여, 우리가 함께 그 큰 날에 주 예수님의 얼굴을 볼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겠네요.

메리 러브

 

로빈슨 목사가 러브 목사에게

1651년 8월 19일

사랑하는 친구여,

하나님의 교회가 당신의 죽음을 인하여 감당해야 할 손실이 제게 매우 큰 시련이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느끼도록 더 마음을 예민하게 만드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클 것입니다. 이 내리치심이 당신의 행복이 되리라고 저는 확신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큰 재앙, 비탄스러운 벌이 될 것은 하나님께서 단번에 많은 사람들을 벌하시려는 뜻을 가지실 때 이런 과정을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밝은 별의 꺼짐은 (제가 알랑거리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세상 전체를 크게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혼인날 전에 당신을 뵙는 은총을 저에게 베푸시기를 바라오니 저는 그것을 죽는 날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은혜의 보좌에 있을 때 당신의 생각 속에 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목사님, 당신이 우리를 떠나시기 전에 하나님의 불쌍한 교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도를 쌓아 주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남기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뿌리시는 것을 어떤 것은 살아서 거둘 것이고 당신께서 거두지 못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는 순간까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셨으니 목사님, 당신의 주인을 따라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다가오는 날의 두려움에 대하여 당신을 격려하려고 어떤 말을 할 필요는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두려움을 자주 정복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행입니다. 그것은 짧은 여행을 가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길은 깊지만 짧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근접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니 멈출 곳이 없는 첩경일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가고 있는 곳인 가나안을 보았던 느보 산에 자주 가신 적이 있다고 압니다. 그 신비로운 머리는 잘려질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증거를 마쳤으니 당신의 상을 받는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이 검은 사자를 빛의 천사로 바꾸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당신을 따라갈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만일 우리가 더 오래 머물면 그것은 단지 험난한 바다에서 노를 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죽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느보산에 올라가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올라가서 죽었습니다. 당신의 가족들에 대한 염려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 너희 아비 없는 자식들을 맡기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실 것이라. 너희 과부들은 하나님을 의지할지어다.” 당신의 사랑하는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은 당신과 같은 은혜의 참여자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인 그들은 얼마나 부요합니까! 당신은 당신의 영을, 더구나 당신의 아내와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 너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목사님, 그것은 인도의 광산보다 더 풍부한 몫입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단지 물동이였지만 샘이 살아있고 당신이 죽었을 때에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없이 먹이실 수 있지만 당신은 하나님 없이 먹일 수 없습니다.

목사님, 힘내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기쁨이 충만한 지를 제가 듣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 큰 바다에 단지 몇 물방울들인 것을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제가 이것을 쓴 것은 당신을 더 많이 채우려는 것입니다. 도끼와 열이 하나일 뿐이고 당신은 질병 없이 죽을 것입니다. 당신이 현재의 치욕을 생각하실 때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짧은 순간에 하나님, 천사들, 온전케 된 의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함 가운데 은혜를 가지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죄의 존재, 악마들의 유혹, 악인들의 집단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당신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당신은 당신의 면류관을 받으러 가시는 것이니 시들지 않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당신은 지금 핍박자의 소리가 들릴 수 없는 그 장소로 가시는 것이니 당신은 침대로 가시는 것이니 당신이 누웠던 것 중에 가장 좋고 가장 안전한 부드러운 침대입니다. 단두대의 계단은 야곱의 사다리가 될 것이니 당신이 그것을 밟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버지께 올라갈 것이며 단두대는 느보 산과 같이 될 것이며 행집행인의 도끼가 죄의 머리를 끊고 모든 재앙을 그치게 할 것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천사들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하나님께서 친히 크게 당신을 힘있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만일 당신의 죽음, 이같은 죽음이 최고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시간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이렇게 쓴 이유는 당신이 저의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저의 사랑, 당신을 향한 저의 진실한 사랑을 증거하며 당신이 떠나기 전에 저와 저의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목사님, 그것을 저의 마지막 작별로 받아주십시오. 안녕, 안녕히 가십시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의 영혼을 생명의 묶음으로 감아올리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로, 기쁨, 소망, 평안, 영원토록 생사 간에 의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가 죽기까지 당신의 인도자가 되시며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과 머리가 되시며, 당신의 어린아이들에게 인자한 아버지가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친구의 확신이며 이것이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가 될 것입니다.

*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 “Christ All and in All”의 저자)

 

젠킨 목사가 러브 목사에게, 짧은 편지

사랑하는 분께,

당신은 제 영혼에 매우 가깝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항상 보이셨던 가장 즐거운 얼굴로 당신에게 미소를 짓고 계십니다. 제가 수감 중에 크게 도움을 받았던 책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졌는데 일만 번의 죽음이 어떻습니까! 책장이 접혀진 곳의 이러한 생각들이 감미롭게 믿음을 돕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말들이 당신을 괴롭힐까봐 이러한 생각들을 보내야 할지 걱정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추상적인 강론보다 이러한 것들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구를 자기의 말씀 외에 아무 것에도 달아놓지 않으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관하여 당신의 영혼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오, 감미롭고 극히 확실하고, 확실하고, 확실하니 오, 확실한 약속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본체처럼 안전하니 그것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담보로 내놓으셨습니다. “내가 산 것 같이…” 사랑하는 목사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입맞춥니다. 당신을 인하여 웁니다. 제가 영광 중에 당신을 뵐 것입니다.

주님 예수께서 당신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그리하실 것입니다.

* 젠킨(William Jenkyn, “Jude” 유다서 강해의 저자)

 

러브 목사가 그의 아내에게

1651년 7월 15일(처음 그가 처형될 것으로 정해진 날, 8월 22일로 연기됨)

런던 탑에서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의 사모하는 집으로 가고 있는 지금 내가 가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기 전에 당신에게 한 마디 써 보내려 하오.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유익으로 위로를 받으며 당신의 손실로 괴로워하지 마시라는 것이오. 당신이 외적인 비탄 아래에 놓인 지금 내적인 염려들을 가라앉히도록 힘쓰십시오. 당신의 외적인 고난이 넘치는 것만큼 당신의 위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게 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근심이 가득한 영을 가진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내 시간이 짧고 당신에게 몇 마디 권면을 드리고 당신을 당신과 당신의 소유를 돌보실 하나님께 맡길 참이오.

1. 당신이 절망 아래 처할 때 천국에 대한 당신의 증거들을 의심하지 말고 오히려 확실하게 하고 분명히 하십시오.

2. 주님 예수께 붙어있음이나 절대 의존의 신앙이 당신을 천국에 데려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행여 당신이 증거나 확신의 신앙이 부족하여도 말이오.

3. 당신이 피조물에게서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힘쓰십시오.

4. 나의 죽음 때문에 근심 중에 당신의 날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만일 천국에서 이곳 아래의 일에 대한 지식이나 근심이 있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땅에서 슬퍼하는 것을 생각하고 마음 아파할 것이오.

5. 영혼을 보살피는 목회사역 아래 머물러 있으십시오. 나는 당신이 더러운 물과 깨끗한 물을 가리지 않고 빨아들이는 스펀지 신자가 아닌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것들 중에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당신에게 주셨으니 마치 입이 맛을 보듯이 당신의 귀는 말씀을 가려낼 것이오.

6.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가운데서 친교를 가지고 금식과 기도로 죄를 억제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면서 당신의 몸의 약함과 당신의 현재의 처지를 고려하십시오.

7. 당신 자신과 아이들을 잘 돌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과 그들을 돌보실 것이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소. 잘 계시오, 사랑하는 이여, 안녕, 안녕.

사랑하는 이여, 당신에게 청하오니 만족하십시오. 내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크게 위로를 받았다오. 나는 그분의 의지의 선한 뜻에 평온하게 순종할 수 있다오. 당신도 또한 그러하기를 바라오. 나는 하나님의 확정된 경륜에 의해서 해방을 받았소.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내가 죽어 떠난 후 당신의 위로를 위하여 예레미야 49장 11절 그리고 12절 처음부분, 이사야9:6-8절, 시5:6, 146:9, 고후4:17-18, 그리고 히브리서12:6,7절을 읽으시오.

이것은 당신의 죽어가지만 위로를 받은 남편의 마지막 말이라오.

런던 탑

크리스토퍼 러브

 

러브 목사가 그의 아내에게

1651년 8월 21일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주 예수님을 위하여 헤어질 그렇게 착하고 그렇게 은혜로운 아내를 가졌다는 것이 내 기쁨을 더해 주었소. 당신의 근심 속에 내가 근심했었지만 당신의 기쁨 속에 내가 위로를 받았다오. 분명코 본성은 큰 침묵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도록 그렇게 무거운 내리침을 감당하도록 당신을 도울 수 없었을 거요. 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쓴 모든 글씨들이 내 마음을 기쁘게 했소. 세상에 메리 러브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나는 생각할 수 없다오. 키트와 몰을 위하여 내가 그들을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이렇게 좋은 어머니에게 남겨두게 되었으니 아픔 없이 그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오.

살아서보다 죽음으로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할 당신의 남편에 관하여는 염려하지 말아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으로 온전히 만족함을 받았다오. 그와 죽음 사이에 약간 뿐이지만 그와 천국 사이에도 약간 뿐인 줄 그가 알고 있다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오.

주님께서 당신의 지혜롭고 착한 뜻에 대해 복을 주시고 보답해 주시기를 바라오. 당신이 나를 막았으니 내가 당신에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을 당신이 내게 써 보낸 것이오. 내가 세상에서 다른 누구로부터 받은 조언보다 당신의 은혜로운 편지들로부터 더 많은 위안을 받았다오.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것임을 꼭 확신하시오. 내가 천국에서 쉴 때까지 나는 쉬겠소.

 

당신의 죽어가지만 위로받은 친구

크리스토퍼 러브

 

러브 부인이 자기의 남편에게

1651년 8월 22일

천상의 연인에게

제가 당신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당신을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전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천국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영광을 희미한 거울로 들여다보듯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내일 천국의 문들이 열리고 당신은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모든 영광을 풍족히 즐기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시지만 머지않아 당신은 천국을 즐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계시는 동안 당신의 영혼으로 평온 가운데 계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믿음의 눈으로 당신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으로 풍족히 누리시게 될 곳인 안식의 항구를 바라보시기 때문이지요. 오, 당신이 당신의 귀한 머리를 단두대 위에 내려놓을 때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 품 안에서 안식하려고 당신의 머리를 내려놓는 것이며 당신이 깨실 때 땅에 속한 시드는 면류관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게 되는 이것을 생각하시어 기쁨으로 당신의 마음을 들어 올리시어요. 당신이 당신 주변에서 나팔을 가지고 의기양양해 하는 보초병들을 볼 때 낙심하지 마시고 당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시어요.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승승장구하는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계신 것을 보실 거예요. 당신이 천국에 이르는 짧은 길에서 마주치게 될 조롱과 비난들에 낙심하지 마시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을 천국에서 영화롭게 하실 뿐 아니라 당신에 대한 기억을 땅위에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예요.

오, 당신의 아내나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생각이 당신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업이 되실 것이니 그는 당신의 과부에게 남편이 되실 것이고 당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되실 것이니 당신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충분할 것입니다.

이제, 사랑하는 분이여, 저는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당신께 대한 저의 권리를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저의 아버지이신 분께 넘겨드리기를 바라오니 그는 당신에 대한 최고의 권익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확신하기로는 사람들이 얼마동안 우리를 떼어놓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머지않아 우리를 다시 합쳐주실 것이니 우리는 영원토록 서로 더 이상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붙들어주셨는지 저로 듣게 하시고 당신을 지탱한 그 위로들을 제가 맛보게 하여 그것들이 저의 가라앉는 마음을 지탱할 대리석 기둥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잘 가셔요. 잘 가셔요, 사랑하는 분이여, 우리가 다시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게 될 거기서 만날 때까지.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신 아버지의 품에 맡기는 그때까지. 제가 영원토록 천국에서 안식할 때까지 잘 있으셔요.

메리 러브

 

러브 목사가 처형당하는 날 아내에게 보낸 편지

1651년 8월 22일, 내가 영화롭게 되는 날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이여,

나는 지금 감옥에서 궁전으로 가고 있다오. 나는 내 일을 마쳤고 이제 품삯을 받게 될 것이요. 나는 나의 세 아이가 있는 땅을 떠나서 나의 두 아이가 있는 천국으로 가는 것이요. 저 위의 두 아이들은 내 돌봄이 필요 없지만 아래의 세 아이들은 당신이 필요하오. 내 두 아이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과 세 아이가 다정하고 경건한 엄마의 팔과 돌봄 가운데 있는 것이 나를 위로하오. 나는 당신이 슬픈 마음을 가진 여인인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의 남편을 세상 밖으로 보냄을 인하여 슬픔이 크겠지만 당신의 아이를 세상으로 보낼 때의 당신의 고통보다는 적을 것이오. 당신은 슬픈 과부가 되겠지만 즐거워하는 어머니가 될 것이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많은 자비들을 예비해 두셨으니 죽어가는 남편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이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자유로웠을 때 감옥에 있을 때만큼 당신을 위하여 그리 많이 기도한 적이 없다오. 더 이상 쓸 수 없으니 실제적인 몇 조언을 당신에게 남기고자 하오.

1. 건전하고 바르고 영혼을 살피는 목회사역 아래 머물러 있으시오. 아, 미혹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와 있지만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낯선 자를 따르지 않소. 진리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목회사역을 찾아가며 잠언 19장 7절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는 솔로몬의 조언을 따르십시오.

2. 주님의 지식과 교훈 안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양육하시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을 때에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 31:1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디모데는 그의 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소. 디모데후서1:5

3. 매일 가족과 함께 기도하여 당신의 거처가 하나님을 부르는 가족들의 수효에 들게 하시오.

4.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을 위하여 힘쓰시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값진 것이오. 베드로전서 3:4.

5. 당신이 없는 위안들을 곰곰이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가진 자비를 주의해 보십시오.

6. 당신의 고난의 분량이나 수준보다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바라보십시오.

7. 하나님께서 당신에게서 세상의 위로들을 가져가실 때 천국을 향한 당신의 증거들을 분명하게 하도록 힘쓰시오. 당신의 고난이 넘칠 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위안들 또한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4

8. 당신의 마음의 거짓됨에 대한 거룩한 경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지만 당신이 당신의 은혜의 진실성에 대한 염려와 의심을 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은혜에 관하여 믿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면 당신에게 있는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베드로가 실루아노에 대해 말한 것 같이 당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오, 사랑하는 이여, 마음이 곧바르고 행위가 거룩하였는데 어찌하여 의심합니까? 내가 당신의 영혼을 대신하여 감히 말할 수 있으니 내가 당신에 대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9. 당신의 마음이 걱정 없고, 당당하고, 자신 있을 때, 그때는 은혜보다는 부패함을 더 많이 살펴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이 의심이 생기며 믿음이 없을 때, 그때는 당신의 연약함보다 당신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10. 은혜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구하고 그런 다음 할 수 있는 대로 걱정해 보십시오. 당신은 이행에 대한 결의, 권리에 대한 소원, 완전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언약에 관여하는 것이니 만일 그 언약이 당신의 것이라면 말입니다. 아, 나의 연인이여! 그러니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꼭 꼭 머무십시오.

11. 하나님의 뜻 안에 당신의 뜻을 던져 넣으십시오. 우리가 쓴 잔을 마셔야 하겠지만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잔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기 위하여 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오, 내가 런던 탑으로 갈 때 당신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십시오.

12. 나의 기쁨 속에 기뻐하십시오. 나를 위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당신이 내 행복을 질투하거나 아니면 의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내 힘입니다. 오, 그것이 또한 당신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사랑하는 아내여! 잘 있으오. 내가 당신을 더 이상 아내라고 부를 수 없고 내가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신랑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가는데 나는 그분에게 영원토록 시집가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당신의 죽어가지만 죽을 때까지 진정 사랑하는 친구인 크리스토퍼 러브, 런던 탑

 

크리스토퍼 러브의 설교

 은 혜 1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에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왕상 14:13)

본장은 두려운 심판이 여로보암과 그의 자손에게 예배에 있어서 그의 우상숭배와, 다윗의 통치와 가문으로부터의 변절로 인하여 임할 것을 예고하는 아히야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이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와 자손을 멸하셨는데 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선한 자들도 그들의 아비의 죄악 때문에 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취해진 이 구절에서 그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비의 죄악 때문에 죽어야 했던 어린 사람 여로보암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다른 사람들이 죽었던 동일한 방식으로 죽지 않는다는 형벌의 경감이 있었습니다.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에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십시오! 그에게 작은 선함이 있었지만 크신 하나님께서 그 작은 선함을 주목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갈밭에서 진주하나를 발견하신 것이니, 여로보암의 집에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하여 약간의 선함을 가졌던 선한 어린사람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 구절에 세 부분이 있습니다.

1. 여로보암의 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탄식.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18절) 그것은 그에게 선함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사모함과 칭찬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죽었을 때에 그리 슬퍼함을 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징벌에 대한 제한. 여로보암의 자손 가운데서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13절)” 여로보암에게 속한 다른 자손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11절)라고 말씀합니다.

3. 그의 삶에 대한 칭찬. “그 안에 선함이 보였으니.” 이에 관하여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그는 성령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함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1) 그의 선함의 특성. 그것은 선한 것이었으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하는 말뿐이나 혹은 의도, 의향이 아니고 그것은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2) 그의 선함의 양. 그에게서 발견된 것은 단지 약간의 선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선함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3) 그의 선함의 신실성에 의하여. 이 어린 사람의 선함에 관하여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양상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고 둘째로 그것이 여로보암의 집 안에 있었습니다.

첫째, 그의 선함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과 글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던 바울의 신실함을 보인 것입니다(고후12:19, 갈1:20).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야고보1:27). 사람들을 향하여는 선하나 하나님을 향하여는 그렇지 아니한 많은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부한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한”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이며 사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 없는 사람이 진정으로 흠 없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여로보암의 집에서 선했습니다. 악한 사람이 선한 곳에서 선할 수 있지만 악한 곳에서 선한 것은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에서 선한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만 이 어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인 여로보암의 집에서 선했다는 것은 그가 진실로 선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의 아버지의 우상숭배에 대해 그가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했다고 낙인을 찍었지만 자기 아들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돔에서 의로운 것이 롯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욥이 갈대아에서 선한 것과, 네로의 궁정에서 성도들이 되는 것처럼 여로보암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말로 선한 일입니다.

본문에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비야에게서 발견된 그 선한 일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성경은 그에게서 발견된 그 선한 일은 무엇인지 상세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테스타투스와 피터 마터는 히브리 랍비들로부터 열 지파의 유대인이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저들의 지정된 시간에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고 여로보암이 군사들에게 그들을 막으라고 명하자 이 아비야가 그 군사들이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도록 그들에게 통행증을 주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를 버리고 단과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세웠던 자기 아버지의 격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라고 그들을 격려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젊은 왕자의 선함이 그가 다윗의 집으로부터 통치를 빼앗는데 동의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말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결정하지 않은 것을 결정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본문 안에서 여러 상황들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부차적인 관점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 들겠습니다.

1) 이 선한 아비야가 죽었던 것을 고려함으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하고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 기대되는 도구들이 죽음으로 인하여 데려감을 당할 수 있는 반면 악한 사람들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다.” 악한 여로보암은 오래 살았고 그의 선한 아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솔로몬이 한 말은 정말 사실입니다. “자기의 의로움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느니라.”(전7:15). 찔레와 가시와 엉겅퀴는 백합이나 장미처럼 빨리 시들지 않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취해 감을 당할 수 있고 세상에서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2) 여로보암의 다른 아들인 악한 나답이 살아 있을 때(왕상16:26) 선한 아비야의 죽음을 생각함으로서, “착한 자녀들이 저들의 부모로부터 죽음에 의하여 데려감을 당할 수 있고 경건하지 않는 자식들은 살아서 그들의 부모들에게 수치와 저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3) 우리가 9절에서 12절까지에서 보는 것처럼 이 착한 어린 사람이 그렇게 빨리 죽게 된 이유를 생각함으로 “악한 자녀들뿐만 아니라 선한 자녀들도 자기 부모들의 죄들로 인하여 외적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4) 이 기대할 만한 젊은이의 죽음을 온 이스라엘이 슬퍼함을 인하여 “생존 시에 훨씬 유용했거나 할 수 있었던 선한 사람들은 그들이 죽었을 때에 많이 슬퍼함을 받는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5) “그는 자기 무덤에 평안히 내려갔다”는 이 말씀으로부터 “전쟁과 전체적인 소란의 때에 ‘평안히 자기 무덤에 내려갔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는 것을 아십시오(사 57:1).6)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선했습니다.”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그렇게 선한 그 사람은 진실로 선하다. 사람이 보기에는 선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롬2:8).

제가 다루려고 하는 중심 주제에 이르기 전에 제가 자세히 설명드릴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첫째, 여기서 선함을 칭찬하고 있는 여로보암의 이 아들의 나이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아이”라고 말합니다(12절). 이로부터 “어린 사람들 가운데서 선함을 보는 것, 어린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임을 보는 것은 아주 칭찬할 만한 일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아비야는 아이였을 때 일찍부터 선했다는 것을 성경이 그를 칭찬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저는 여러분에게 어린 사람들이 선한 사람인 것을 보는 것은 칭찬할 말한 일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먼저 성경이 어린 사람들이 선한 사람일 때 그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바댜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고 말씀합니다(왕상18:12).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3:15)라고 디모데를 칭찬하여 기록했습니다. 제롬은 요한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고 생각합니다(요13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린 시절의 친절함을 더욱 정답게 기억하십니다(렘2:2).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령보다 젊을 때의 친절함을 더욱 정답게 취하십니다.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요한에게 기쁨이 있었습니다(요삼3,4). 하나님께서 복음서에서(누가10장) 젊은 사람 안에 있는 도덕적이며 일상적인 선함을 칭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도덕적인 선함과 본성적인 성품 때문에 “그를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2. 어린 사람 안에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크게 칭찬받을 만한 이유는 그들에게 유혹이 더 많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성정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은 다른 어떤 연령보다 죄를 범할 더 강한 경향과 기질이 있어서 그들의 피는 더 빨리 분노에 충동을 받으며 그들의 힘은 정욕에 충동을 받습니다. 각 관계마다 특이한 죄를 가지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의 각 연령에 따라 죄가 있습니다. 노년은 역정을 잘 내며 욕심이 많습니다. 중년은 거만하며 심술궂고 앙심 깊습니다. 젊은이는 대개 성급하고 정욕적이고 육감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젊음이 그렇게 많은 유혹들에 노출되며 그렇게 많은 부패함에 영향을 받기 쉬운 것을 생각할 때 젊은 사람들이 착한 것을 보는 것은 귀합니다.

오, 그러므로 젊은 당신에게 간절히 권하는 것은 때맞춰 경건해지고 이 일에 서두르십시오.

1) 만일 당신이 젊을 때 선하지 아니하면 당신은 시편기자의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시71:9) 그리고 그가 바로 앞에서 말한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5절)는 주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세상을 떠날 때 그러한 주장을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2) 성경에 다양한 부류와 여건 속에서, 다양한 직업 중에서 선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성령께서 그들의 선함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했던 나이를 기록했음을 생각하십시오. 솔로몬은 젊은 왕이었고 오바댜는 젊은 신하였고 다니엘은 젊은 선지자였고 이곳의 아비야는 젊은 왕자였습니다. 이들이 모두 선한 젊은이들이었고 우리의 모범과 격려를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심에 있어서 어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이든 사람들을 지나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같이 동생 아벨은 의로웠고 가인은 악했으며 동생 야곱은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미움을 받았으며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 막내였습니다만 그 중에 최고였고 여호와께 택함을 입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자식들을 축복할 때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창48:14) 축복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주 행하십니다. 그같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자주 가장 어린 자를 택하십니다. 그같이 하나님께서 요셉처럼 여럿 중에서 “베냐민을 내게 데려오라”고 하시고 그에게 갑절의 분깃을 주십니다.

4) 당신의 젊은 시절이 당신의 일생에 있어서 신앙의 훈련과 경건의 직무를 힘쓰기에 가장 자유로운 시기입니다. 아랫사람들인 젊은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염려와 장애들이 손에 가득하고 마음을 내리누르는 때인 나중에 성장했을 때보다 더 자유롭고 덜 근심스럽습니다.

5) 만일 당신이 젊었을 때에 은혜롭지 못하면 당신의 젊었을 때의 죄들이 노년에 당신의 양심을 괴롭힐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한창 젊을 때에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많은 젊은 사람들이 몸의 상처와 멍을 가져서 그들이 죽는 날까지 그것으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당신의 양심에 상처나 멍을 준 당신은 노년에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 죄들은 당신이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당신의 양심에게 시련이 되고 당신의 마음에게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들을 저주하시려고 여러분의 젊었을 때의 죄들을 기억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여러분의 양심에 고통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여러분으로 기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젊을 때의 기쁨이었던 이 일들이 노년의 괴로운 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노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시는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당신의 젊은 시절의 죄를 가지도록 하시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뼈들을 당신의 젊었을 때의 죄들로 채우시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젊었을 때 당신의 양심에 무거운 짐을 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책망의 두 번째 적용

첫째, 젊을 때 선한 것 대신에 많은 악들로 자기의 젊은 시절을 채우는 악한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대개 이러한 악들에 굴복합니다.

1) 자만은 젊을 때의 죄입니다. 새로 입교한 자가 설교자가 될 수 없는 것은 교만하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전3:6).

2) 성급함과 분별력이 없음이 대개 젊은 사람의 죄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라(딛2:6)고 말했습니다. 르호보암으로 자신의 왕국을 잃게 했던 어린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조언은 얼마나 성급하고 분별이 없습니까! 세월이 경험을 가르칩니다.

3) 정욕이니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젊은 디모데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게 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물과 함께 약간의 포도주를 마시라고 조언했던(딤전2:22) 음식을 매우 삼가는 사람인 디모데가 이러한 주의를 필요로 했다면 죄를 억제하는 일에 단련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해야겠습니까? 이것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전11:10)”고 조언하게 했습니다. 그는 창기를 따라 집까지 좇아갔던 젊은이였습니다.

4) 판단의 약함과 불안정성. 그러므로 잘못된 시절에 어린 사람들이 미혹을 받습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합니다(엡4:14). 히브리어로 젊은이를 나아르라고 하는데 이는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나아드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그들의 판단과 결심에 있어서 변하기 쉽고 불안정한 것을 암시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성급한 부자청년은 얼마나 빨리 변했습니까?

5) 노인들을 비웃고 비난함. 어린 아이들이 노년의 선지자를 조롱했고 젊은 사람들이 욥을 비웃었습니다.

6) 육적인 쾌락과 오락.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시절에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삿14:10).”

둘째, 젊을 때에 선하게 보였지만 노년에 선함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책망이 무섭게 쏟아집니다. 여호야다의 지시를 받는 동안 선한 젊은이 같았지만 그가 죽자 타락했던 요시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젊은 시절 자기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애정과 열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어서 어머니에게 잘 가르침을 받았지만 늙어서 아내들이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했던 것은 솔로몬에게 낙인이었습니다. 그처럼 다윗도 그의 첫날들이 그의 말년보다 나았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젊었을 때 경건을 좋아하고 예배를 사랑하였지만 나이 들어 극히 희미해져서 그들의 선함의 진실성을 염려하게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진정 젊을 때에 선하다면 그의 노년에서 또한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놀라운 상황은 이것이니 어린 아비야가 “여로보암의 집에서” 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악한 장소들과 가정들 가운데 살면서 자신들의 선함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일임을 아십시오. 그것이 그러함을 우리는 성경이 악한 장소들 가운데서 선했던 사람들에 대해 행한 칭찬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2:13).” 버가모는 아시아의 모든 도시들보다 우상숭배에 더 많이 빠진 도시였습니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부인하지 않은 몇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네로의 집안에서 신자가 된다는 것은 크게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악한 곳에서 자신들의 선함을 버리거나 약해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넘어졌습니까? 좋은 친구들과 있을 때 그는 열심이었지만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그같이 아브라함이 그랄에 있을 때 자기 아내를 부인했고, 이삭 또한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궁정에서 바로의 삶으로 맹세하는 궁정 맹세를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그들이 이방인들의 예절과 풍습을 배우지 않도록 그들과 섞이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악한 곳들은 열성이 들이마시기에 나쁜 공기와 같습니다. 가시덤불 속의 양이 털의 일부를 잃는 것처럼 악한 친구들 속의 선한 사람들은 선함을 많이 잃어버립니다. 피부병을 앓는 양이 양떼 전체를 전염시키듯이 쓴 뿌리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더럽힙니다.

2) 악한 장소에서 선한 것은 사람의 선함이 참되다는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실망거리를 가지고도 선하고 거룩할 때 당신의 은혜가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진실로 선하다는 것과 당신의 선함이 가짜가 아니고 어떤 악하고 위선적인 목적에 끌린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선한 사람들과 선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만 악한 사람들 가운에서 선한 것, 최악 가운데서 최선인 것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의 권능과 흐트러질 수 없음을 배우십시오. 은혜는 극히 악한 때에 사람으로 선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감옥이나 나쁜 무리에게(이것은 가장 악한 시험입니다) 던져보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그는 결코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는 기름에 비유됩니다. 자, 기름을 물그릇에 넣어 보십시오. 그러면 기름은 물 위에 뜰 것입니다. 짠 바다에서 물 전체가 물고기로 짜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악함이 은혜의 본질을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물고기같이 악한 장소에서 선함을 유지합니다. 그같이 요셉은 악한 바로의 궁에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궁에서, 오바댜는 아합의 궁에서,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궁에서, 성도들이 네로의 집안에서, 아비야는 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여로보암의 집에서 선함을 유지했습니다.

2) 악한 장소들에서 선한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지만 당신은 악한 곳에서 사는 것을 몹시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죄가 아니지만 당신의 비참함입니다. 그같이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120:5).” 곧 죄 많고, 우상숭배하며, 야만적인 사람들인 이스마엘 후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같이 롯의 의로운 심령은 그가 소돔에 거할 때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상했습니다(벧후2:7,8).

3)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거하게 하신 장소나 가족이 악할수록 당신은 더 훌륭하고 더 흠 없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것으로 인하여 당신의 신앙을 빛나게 하며, 대적들의 입을 막으며, 다른 사람들을 유인하여 설득해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야 합니다(빌2:15). 별들은 어두운 밤에 가장 빛나고 불은 춥고 서리 낀 날에 가장 뜨겁게 타오릅니다. 그같이 당신의 신앙의 별로 당신이 사는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게 해야 하고 당신의 열심의 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냉랭한 때에 가장 뜨겁게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4) 그러므로 사람들이 악한 장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들의 악함을 핑계하는 것은 헛된 변명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잘못이었으니 자기의 거짓말이 그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세네카는 자기들의 악함의 탓을 자기들이 사는 곳의 악함에 돌리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야망이 없지만 로마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비싸고 화려한 의상에 집착하지 않지만 내가 로마에 있을 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당신으로 악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마음의 악함이지 장소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선할 수 없는 아무 곳도 사람을 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아담은 낙원에서, 유다는 그리스도의 무리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아무 곳도 사람으로 죄로부터 구실을 댈 수 없게 합니다.

5) 악한 장소에서 선한 것이 칭찬받을만하면 선한 장소에서 악한 것, 아름다운 초장에서 더러운 돼지가 되는 것은 몹시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한 가족 중에서 악하여 선한 조언들을 멸시하며 신앙 있는 가족 중에서 신앙의 도리를 혐오하는지요!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하인들 중에서 악했다면 유다가 사도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자신의 무리 중에서 배반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가요!

6) 악한 장소와 악한 동무들 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당신이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고 싫어”해야 합니다(유23절). 어떤 사람은 이를 죄의 기회를 피하라고 해석합니다만 퍼킨스 목사는 악한 친구들을 싫어하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의식법에 빗대어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전염된 옷이나 부정하게 된 어떤 옷을 가졌으면 그것과의 접촉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레15: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신22:10)”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귀는 부정한 짐승이며 소는 정결한 짐승에 속하므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이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고 신학자들이 주석을 합니다. 그들이 때때로 함께 모일 수는 있지만, 함께 멍에를 멜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매우 악한 사람과 거래할 수 있습니다. 장사는 금하지 않았지만 불필요한 친근함을 가지고 악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7) 경건한 자들과 사귀며 선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정당한 경우가 요구할 때 악한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정당하지만 선한 친구들과 있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13:20) 향수 가게에 들어갔던 사람이 냄새를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사람은 경건한 사람과 사귐으로써 선한 것을 가지고 다닙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친구를 취하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여로보암의 가족과 같은 집에 두신다면 선한 아비야를 닮으십시오. 그에 대해 성경은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은혜 2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왕상14:13)

본문의 상황으로부터 모을 수 있는 견해들을 신속히 다루었으니 이제 주요 교훈을 제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친히 이루시는 은혜의 매우 작은 시작들, 매우 약한 은혜들을 정확하게 주목하실 뿐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시고 은혜롭게 상 주십니다.

저는 이러한 요점을 확증하기 위하여 무수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smoking flax)를 끄지 않으시기를”(마12:20). 강한 참나무가 부서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상한 갈대가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빛과 타는 횃불이 아니라 꺼져가는 심지가 꺼지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불은 거의 없고 연기가 많은 연약함이 있는 꺼져가는 심지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끄지 않으시고 귀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 속에 의도된 것보다 적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도보다 우리의 관점에 적응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끄시기는커녕 그 연기 나는 심지를 귀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상한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라(시51:17)고 곧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은 푸른 열매가 익은 무화과나무와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포도나무에 대해 말합니다(아2:13). 곧 어린 회심자들 속에서 은혜의 적은 분량과 약한 시작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그의 코에 감미로운 냄새와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도는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아7:12)” 그리스도께서 어린 움을 익고 자란 과실같이 여기십니다.

그 교훈을 다루면서 저는 이 두 가지를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 중 얼마는 단지 은혜의 약한 분량과 적은 시작을 가진다. 2) 단지 적은 은혜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상을 주신다.

 

1.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일부는 단지 그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진 은혜의 시작만을 가집니다. 이것을 다루는데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1) 그 제안의 진실성은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저는 자기들 속에 일어난 은혜의 적은 분량을 가진 사람들이 어떠한지 아는 발견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3)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 가운데 자신의 사람들을 모두 은혜에 있어서 같은 권능과 수준에 두지 않으려고 하시는지 보일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일부가 은혜에 있어서 약한 것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다른 이름들과 칭호들에 의해서 그들이 은혜에 있어서 다른 분량과 성숙을 가진다는 것을 보입니다. 1) 어떤 사람은 강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약하다고 합니다. 2)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다른 사람들은 “장성한 자”들로 불립니다. 3) 어떤 사람들은 “의의 나무,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자란 명예로운 식물”로 불리고 다른 사람들은 “상한 갈대”로 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양떼의 새끼들이며 어린양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양떼 앞에서 당당히 가는 수염소들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열심과 활기로 불타는 은혜를 가졌으니 그들은 불의 영을 가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연기 나는 심지일 뿐이니 약함의 연기를 많이 가졌지만 은혜의 불꽃을 적게 가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과 연령, 힘, 신장 등 육체적인 것의 차이들 사이에 있는 대비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사람의 다양한 연령의 비유 아래 다양한 은혜의 수준을 제시합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룸”(갈4:19), 영적인 잉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벧전1:23,2:2)일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들인 아비들(old men, 요일2:13)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인들 속에 있는 은혜의 다양한 수준들을 나타내니 어떤 사람은 적게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과수원인 그의 교회 안에 온갖 종류의 나무들,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아4:14)”들이 있습니다.

브라이트만은 이 본문에서 이것으로 여러 종류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한다고 지적합니다. 나도와 번홍화는 어리고 약한 신자들이니 이 식물들은 땅 위에 겨우 머리를 내미는 여린 식물입니다. 창포와 계수는 두 큐빗 정도의 관목들로서 중간 크기의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며 다른 나무들은 은혜에 있어서 더 훌륭한 분량과 성숙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가리킵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은혜에 있어서 적은 분량과 작은 시작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직무(duties, 의무 혹은 봉사)에 많이 의존하는 것은 당신이 아직 은혜에 있어서 약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어린 기독교인은 미숙한 목수와 같아서 많은 대팻밥을 만들고 열심히 망치질을 하지만 숙련된 목수같이 적은 대팻밥을 만들고 적은 망치질을 하지만 매끄러운 물건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같이 어린 기독교인들은 직무의 사용에 있어서 빈번하지만 직무를 의존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직무들이 자기들을 성도가 되게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들의 직무를 구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린 기독교인들은 직무에 있어서 열정이 있고 직무에 빈번하지만 자기들의 직무들 가운데 있는 자신들의 결점을 보지 못합니다. 직무를 저버리는 것이 거짓 신자의 표지인 것같이 자기의 직무를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은 어리고 약한 신자의 표지입니다.

2) 약한 기독교인은 그의 실천에 붙어있는 친밀하고도 영적인 결핍들을 분명하게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은사들을 보며 자신의 열정들을 주목하지만 자기의 마음의 허영, 자기의 의도의 불순함, 자신의 직무에 대한 육적인 의지,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헛된 자랑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성숙된 기독교인은 이러한 일들을 알아챕니다. 숙련된 기독교인은 직무에 있어서 자신의 부족, 그것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많이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어떤 때에 자기 속에서 은사들과 은혜들의 확장을 인식하지만 그는 상당한 영적인 자만, 인기와 칭찬, 은사들의 과시, 자기의 역할들을 나타남에 있어서 너무 무모함을 분별하게 되는데 약한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3) 사소한 문제들에 있어서 너무 꼼꼼한 양심을 가지는 것은 약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들을 “믿음에 있어 약하다”고 하는데 그들은 성경이 자유롭게 한 것에 대해 양심을 얽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 한 사람은 자기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다른 사람은 여러 것들을 먹는 것의 적합성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의심한 사람들을 사도는 “약하다”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기 쉽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알지 못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남용하는 것은 우리가 적은 은혜를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어린 회심자들은 하나님께서 여기시는 죄들보다 더 많은 죄들을 만들고 그들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 자신들을 당황하게 하고 얽히게 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안에 양심적인 면밀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고 양심의 민감함이 우리의 직무이지만 고통을 주며 뒤얽히게 하는 세심함은 우리의 약함입니다. 하지만 약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보다 나으며 약한 믿음이 죽은 믿음보다 나으며 꼼꼼한 양심이 화인 맞은 양심보다는 낫습니다.

4) 우리의 고유한 부르심들을 무시하면서 신앙의 활동들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에 있어서 약하다는 표시입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인 십스 박사의 좋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이 활동하는 기독교인, 많이 기도하고 많이 일하는 기독교인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린 회심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열정은 강하며 활발하고 자신들은 충분히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빈번히 자기들의 부르심의 직무들을 무시하니 이것은 그들의 약함과 부족을 드러냅니다. 숙련된 성숙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일반적인 것과 고유한 부르심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고(regular) 그같이 이것이 저것을 밀어제치거나 훼방하지 않습니다.

5)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은혜 속에 약함을 나타냅니다. 고린도사람들이 그러했으니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 젖먹이들, 비천하고 낮고 육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가지기는 했지만 기독교인들의 권능은 극히 적게 가졌을 뿐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성령보다 육신에 속해 있다는 냄새가 났습니다. 무지는 자주 칭찬의 원인입니다. 적은 지식만을 가진 약한 기독교인들은 사람들 자체에 쉽게 끌려서 한 사람은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사람의 외모로 취하는 죄를 범하며 한 목사를 치켜세우고 다른 목사들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우상시하고 다른 사역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당신이 믿음에 있어서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견실한 기독교인은 모든 올바른 사역자들을 사랑하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6) 쉽게 유혹에 빠지고 오류에 따라가는 것은 은혜에 있어서 약함을 드러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을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어린아이들”(엡4:14)이라고 부릅니다. 머리의 약함은 은혜가 당신의 가슴속에서 그렇게 강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확고함에서 떨어지지 않는 방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니 사도 베드로는 이 두 직무를 결합시켜 베드로후서 3장 17절에서 “굳센 데서 떨어지지 말라”고 권한 후 18절에서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고 권합니다. 강한 기독교인들은 견고하지만 약한 기독교인들은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의견들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러한 신자들은 그들이 은혜를 가졌다면 단지 약한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7) 그러한 사람들은 단지 신앙의 일반적인 원리들을 알지만 신앙의 깊은 것과 비밀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신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여(히5:12,13)”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복음의 더 확고한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처음에 구속의 비밀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하여 무지했고 또 부활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알지 못하기를 성령께서 오셔서 이러한 일들을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르치신 일들을 생각나게 하실 때까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8) 약한 기독교인들은 감정에 있어서 강하지만 판단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개 빛보다는 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기독교인들은 어린 말들과 같으니 그들이 힘은 많지만 여행에는 적합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정된 걸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열심과 열정을 가졌지만 판단에 있어서 견실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에 있어서 약함이 많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9) 약한 기독교인은 꾸지람을 견뎌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격렬한 날씨가 당신이 약한 몸을 가졌는지 강한 몸을 가졌는지 드러냅니다. 그같이 격렬한 책망이 당신이 약한 영적인 성품과 기질을 가졌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 그 선지자가 앞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그 책망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한 선지자의 충실한 책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선지자에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10) 자기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자기 몸을 위해서는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약한 신자입니다. 그같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천국과 행복을 기대하며 자기들의 영혼과 영원한 관련사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음식과 옷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약한 믿음을 가졌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만 땅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입니다. 양식이 떨어졌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그들이 마련할지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영생의 떡을 위하여 나를 믿을 수 있고 이생의 떡을 위해서는 나를 믿을 수 없단 말이냐?

1. 그러므로 당신 자신 안에 가진 것이 단지 은혜의 적은 분량뿐이라는 것을 아는 당신이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부족과 불완전함을 바라보시고 은혜 안에서 자라시고 어떤 분량으로도 만족하지 마십시오. 은혜 안에 적은 시작들을 당신에게 실망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들에서 높이 솟은 참나무를 볼 때 이 큰 참나무가 한 때는 하나의 도토리였다고 하시겠지요. 지금 어린 가지들뿐인 기독교인들은 이후에 큰 백향목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강해질 것이라고 당신의 영혼에게 말하십시오. 은혜가 참된 것이라면 자랄 것이고 연기 나는 심지는 하나님의 촛대에서 타올라 빛나는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아주 큰 분량으로도 만족하시면 안 됩니다. 또한 은혜의 아주 적은 분량으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은혜의 적은 분량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조금이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모태에서 한 자면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요람에서는 석 자면 충분하고 무덤에서는 일곱 자로 충분하지만 요람과 무덤 사이에서는 온 세상이라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재물과 욕망으로 인하여 당신은 다고 다고 외치는 말거머리와 같고 결코 족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무덤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되겠습니까?

 

은혜 3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왕상14:13)

우리는 성경에서 적은 은혜를 가진 사람들의 예들을 제시했고 이제 세 번째 질문을 답할 차례입니다.

질문 3.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중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수준에 있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들 중에 단지 은혜의 시작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도록 정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답: 중생은 창조의 때와 같지 않고 의의 나무들은 처음 모두 완전하게 창조되었던 낙원의 나무들과 같지 아니한 것이 사실입니다. 은혜의 역사에서는 다릅니다. 우리는 한 번에 완전하게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점차 거룩함을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중 일부에게 단지 은혜의 적은 시작과 분량을 주시는데 이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땅 위에서의 우리의 처지와 하늘에서의 우리의 존재 사이에 차별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에서의 영광의 수준의 다양성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수준을 가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의인들의 영은 모두 온전케 될 것이고(히12:23)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동일하게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라고 죄를 사해 주시고 약한 자라고 허물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의롭다 여기시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성화가 지금의 우리의 칭의와 같을 것이니 곧 완전하고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분들의 완전함 뿐 아니라 수준의 완전함을 가질 것입니다.

2.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계속 의지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공급하심 가운데 살게 합니다. 만일 아담이 지음을 받은 것처럼 어린아이들이 성숙한 어른으로 태어난다면 우리는 부모의 지속적인 필요나 부모를 의지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태 안에서 잉태되어 후에 세상에 태어나고 점차 성장하여 더욱 어른이 됩니다. 은혜에 있어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같이 다루십니다. 회심의 은혜는 우리를 우리가 나중에 되어야 할 것처럼 완전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무들로 모두 열매를 맺으며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것들이 처음에는 낟알과 씨이며 그들이 자란 나무가 되기 전에 어린 식물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영향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같이 우리는 처음에 갓난아이들이며, 이어 청년들이며, 그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른들이니 우리의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계속 의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더 큰 단장을 위함입니다. 육신에 있어서 각 지체의 크기가 똑 같다면 그 몸은 괴상할 것입니다만 몸이 다양한 지체들로 어우러져 작은 지체들이 큰 지체들에게 도움이 되고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조화로운 모습으로 상호 작용을 맡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모든 현악기들이 같은 크기라면 하모니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현이 베이스이고 다른 현이 트레블이라면 그 음악은 더 아름다운 선율일 것입니다. 은혜에 있어서도 그와 같습니다. 은혜의 다양한 수준은 그리스도의 몸을 더 조화롭게 만듭니다. 귀한 수편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만일 모든 견사들이 한 색깔이면 다양한 색이 줄 수 있는 광채와 아름다움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세우기 위하여 함께 교제와 친교를 유지할 필요성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강론이나 거룩한 교제는 만일 우리의 연약함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몸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각 지체가 다른 지체에게 도움이 되게 정하셔서 눈이 손더러 나는 네가 쓸데없다 하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고전12:21)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그러하여 어떤 사람들은 약하고 다른 사람들은 강하여 함께 친교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연 가운데 약한 본성적으로 것은 자기들보다 더 강한 것들에게 매달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잠30:26)이 있고 비둘기는 새들 가운데 가장 순진하고 융통성 없는 동물이지만, 바위틈에 숨습니다(아2:14). 포도나무는 나무들 가운데 아주 약하지만 그것이 벽에 붙습니다. 식물들 가운데 홉(Hop)은 약하지만 기둥을 감아 올라갑니다. 그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로 어떤 그리스도인은 은혜에 더 강하고 어떤 이는 더 약하도록 정하셔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고 각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모든 영광스러운 속성들 가운데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 안에 은혜의 다양한 크기는 하나님의 자비와 풍성한 은혜를 자랑합니다(glorify). 단지 은혜의 적은 분량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은혜의 적은 분량을 영광의 큰 분량으로 상주십니다.

2)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합니다(magnify). 우리가 약할 때 크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 중에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 그러므로 바울은 10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것입니다. 작은 불꽃이 홍수 같은 물속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은 큰 권능의 나타냄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의 은혜의 적은 불꽃이 당신의 부패함의 홍수와 급류에 의해서 꺼지지 아니하는 것을 보십시오. 은혜의 지극히 적은 분량이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한 것입니다. 천사들을 지켜주시는 일에 있어서는 약한 신자들을 지켜주시는 것만큼 하나님의 많은 권능을 필요로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변할 수 있지만 완전한 피조물들이고 그들을 끌어내리는 죄와 부패함의 무거운 것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 우리는 죄를 향한 성향과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매 순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천사들을 무죄함의 상태에서 보존하는 것보다 비천한 신자를 은혜의 상태에 보존함에 있어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은혜를 보존하심에 있어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적은 은혜를 크게 하심에 있어서도 나타납니다. 은혜는 처음에 사람의 손 크기였지만 나중에 온 하늘을 덮었던, 엘리야의 사환이 보았던 그 구름과 같습니다(왕하18:44). 참된 은혜는 퍼지며 커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은혜들의 커짐은 성소의 물에 대한 환상에서 처음에는 단지 발목까지, 그리고는 무릎까지, 그리고 허리까지 마지막에는 아주 깊어 그들이 건너갈 수 없게 된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지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에서 모두 동일한 용적과 크기가 아니고 어떤 것은 더 크고 어떤 것은 더 작은 피조물들의 다양성에 의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의 지혜는 얼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의 더 큰 분량을, 얼마는 더 작은 분량을 가진 것에서 나타납니다. 창조 전체를 탐구해보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를 피조물의 다양성에서 발견하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크고 작은 광명들과 다양한 크기의 별들이 있어 하늘을 아름답고 빛나게 합니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있고 공중에는 큰 독수리와 작은 참새가 있으며 땅위에는 코끼리와 작은 개, 기는 동물 중에는 커다란 뱀과 작은 개미, 식물 중에는 큰 백향목과 벽의 우슬초, 또한 이성적인 동물 중에 거인과 난장이, 큰 키의 어른과 한 뼘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같이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서 자연의 조화의 다양성에서 크게 나타나는 것처럼 자신의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자녀들 사이에 은혜의 다양한 조화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이러한 점들을 적용하기 전에 은혜의 적은 분량에 관한 일반적인 제안 몇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1. 교회 안에서 강한 신자들보다 약한 신자들, 노년의 장성한 신자들보다 어린 회심자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숲에 오래된 나무들보다 어린 싹들이 더 많고 과수원에 늙은 뿌리들보다 어린 접지들이 더 많고 세상에는 노인보다 어린이들이 더 많습니다. 니느웨에는 12만명의 어린이들이 있었으나 노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보십시오. 더 큰 부피를 가진 것들은 적은 수를 가집니다. 바다에는 큰 고래들보다 어리고 적은 물고기들이 더 많고 지상에서 매우 작은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공중에는 새들의 무리보다 파리 떼가 더 많은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나이든 신자들보다 어리고 약한 신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것은 마치 요나단이 다윗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쏘았던 표지 화살과 같아서 둘은 표적에 미치지 못했고 하나만 넘었던 것입니다. 그같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빌3:14)”의 표적에 맞추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못 미치는 것입니다.

2. 오랜 기간 신앙을 가져왔고 은혜의 수단들을 접해 왔지만 단지 은혜의 약한 분량과 작은 시작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서의 신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나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여기에 적용하고 싶습니다. 일찍 일어나 나선 이들, 말하자면 신앙고백의 첫 걸음을 내디딘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 뒤에 좇아 나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앞질러 간 것입니다. 은혜의 약한 분량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멈추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고백(profession)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유능함(proficiency)에 의해서 은혜의 능력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신자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경험과 분별력을 얻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3. 은혜의 극히 작은 분량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게 하는 공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큰 분량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공로에는 어울림이 있어야 마땅한데 은혜와 영광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의 공로입니다. 우리의 섬김들(services)은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우리의 사역들은 일시적이지만 우리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가벼운 일들과 영원한 영광의 중함 사이에 유사한 것이 없습니다. 아가서에서 교회는 몸의 지체들에 따라서 말합니다.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1:10,15) 자,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눈, 머리, 이, 입술, 말, 이마, 유방, 목을 칭찬하시지만 손을 칭찬하지 않으시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곧 교회가 많은 아름다운 장식들과 용모들, 많은 은혜들로서 단장했지만 그녀 자신의 모든 행위들에 의해서는 그리스도의 손에서 받을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입니다.

4.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의 적은 분량에 만족하여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적은 은혜가 당신으로 천국에 데려갈 수 있지만 당신은 거기에 있으면 안 됩니다. 만일 적은 은혜를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더욱 얻도록 힘쓰십시오.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들을 생각하십시오,

1) 은혜의 적은 분량은 당신 스스로 느낄 수 없거나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들은 작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공중에 이리저리 떠도는 작은 먼지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작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하는 이유이며 은혜가 적기 때문에 분별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과 마가복음 4장 40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의 차이로부터 당신은 위로에 있어서 활성화되지 않은 적은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적어 그들이 처한 위급상황에서는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당신이 적은 은혜를 가지고서는 위로에 관하여 그 적고 약한 은혜는 강한 위로의 길에서 당신을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약한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여지며 더 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은혜의 강함이 우리에게 강한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2) 은혜의 적은 분량이 당신으로 하여금 천국에 데려갈 수 있지만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약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분별과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확실치 않은 논란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참아주어야 합니다. 영적이고 강한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유익합니다. 어린 회심자들은 신앙에 관한 사역에 적합하지 않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눅22:32) 그것은 그의 처음 회심이 아니라 그의 신앙의 진보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 자신이 강하여진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린 회심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직무들이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마9:16,17) 파레우스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곳이 양심의 처지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지 않느냐?” 그들은 낡고 약한 부대들과 같고, 새 포도주와 같아서 그들을 상하게 할 수 있었던 강한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3) 은혜의 적은 분량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많은 열매를 맺을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많은 처방과 수고에 적은 열매는 포도원지기에게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은혜의 적은 분량에 만족하여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적은 분량을 크게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를 많은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눅9:17). 은혜의 활용은 은혜를 크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은혜가 커지면 모든 것을 하나님 덕분인줄 아십시오. 당신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달란트가 그것을 얻게 한 것입니다.

 

적용 약한 그리스도인들, 단지 작고 적은 선함을 보이는 어린 아비야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을 드립니다.

1) 여러분의 은혜는 양적으로는 작지만 가치에 있어서는 큽니다. 진주는 크기에 있어 작지만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같이 적은 은혜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마음은 가치가 없으니 여러분이 상당한 지식과 외견상의 은혜를 가질 수 있지만 진정한 가치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릇들이 가득한 가게가 값진 상품들로 가득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 관련된 은사들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재목일 뿐이며 그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2) 당신의 은혜가 당장은 작지만 장래에 큰 분량으로 자랄 것입니다. (씨 중의 가장 적은 씨인) 겨자씨는 제때에 자라 나무가 됩니다. 은혜는 적합하게 누룩에 비유되었는데 그것은 퍼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본 그 구름에 비유되고 항상 불어나는 “성소의 물”에 비유됩니다. 유아가 점차로 자라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은 삼나무의 씨들이 아주 작지만 그들에게서 매우 큰 나무가 나온다는 것을 관찰합니다. 은혜의 출생과 성장이 그렇습니다.

3) 영혼 속에 한번 시작된 은혜의 적은 분량은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성화를 의미하니 그것이 부패를 이길 때까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했습니다. 주님께서 신실하사 그것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데 나아가라고 명하셨고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할 때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기초만 쌓고 그것을 마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시138:8)” 하시는 분이십니다.

4) 가장 약한 그리스도인은 양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은혜를 가집니다. 당신의 은혜가 다른 사람들처럼 많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은혜처럼 참된 것입니다. 당신이 어제의 회심자일 수 있지만 은혜는 신앙에 있어서 오래 믿은 사람처럼 참된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양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1) 창시자가 하나님인 점에서,

(2) 동일한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3) 그것을 일으키는 수단들인 말씀과 성령이 같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적은 은혜는 참된 은혜입니다. 불꽃에서 불은 큰 불길 속에서 불과 같고 한 방울의 물은 큰 바다의 물과 같습니다. 적은 은혜는 참 은혜입니다.

(4) 그것이 영혼의 구원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벧전1:9

(5)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한 은혜가 당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사27:8).” 당신은 강한 그리스도인처럼 시험의 사나운 폭풍을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10:13)” 하나님께서 영이 곤비하지 않도록 돌보실 것입니다(사57:16)

(6) 은혜의 지극히 적은 분량이 당신으로 천국에 데려가기에 충분하다는 이것으로 당신의 위로를 삼으십시오.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당신으로 게으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혼란된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의 은혜가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은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3:8).” 우리의 위로가 많은 수준에 많이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수준에 있습니다. 강한 은혜는 강한 위로를 가집니다. 많은 믿음이 많은 위로를 가지고 천국으로 당신을 데려가겠지만 적은 믿음은 당신을 천국에 안전하게 데려갈 것입니다.